지난 8월 3일 보길도로 가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동천석실(洞天石室)이다. 전에도 가보왔으나 산기슭에 있는 정자로만 보았다. 겉모습을 보고 와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보길도 윤선도 원림을 보면서 동천석실이 남다른 곳이라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그곳은 윤선도가 설계한 선계(仙界)였다. 유학자가 꿈꾼 선계라니, 어떤 의미일까. 동천석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먼저 윤선도가 보길도에 원림을 조성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보았다. 서울에서 자란 윤선도가 남쪽 보길도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강화도로 가려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고, 미리 길을 떠난 빈궁과 원손대군은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해남 향리의 자제와 집안의 노복 수백을 모아 배를 타고 강화도를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갔다.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강화도는 이미 적에게 함락되었다. 되돌아오는 뱃길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울분에 차 그대로 은둔할 결심으로 곧바로 탐라(耽羅)로 향했다. 도중에 보길도를 지나게 되었는데, 윤선도는 보길도의 수려한 풍경에 마음이 끌려 그것에 머물고자 하였다. 윤선도는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하였다. 고산이 이곳을 부용동이라 한 연유는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하여 부용이라 이름했다”고 ‘보길도지’에 전한다.

보길도 동천석실. 윤선도가 인간세계를 떠나 선계를 꿈꾼 곳이 동천석실이었다. [사진=정유철 기자]
보길도 동천석실. 윤선도가 인간세계를 떠나 선계를 꿈꾼 곳이 동천석실이었다. [사진=정유철 기자]

윤선도는 보길도 격자봉 아래 잡목으로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보길도에 자리 잡은 윤선도는 그만의 자연관으로 원림을 하나하나 조성하였다. 낙서재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을 철저히 신봉하는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낙서재 뒤에는 소은병(小隱屛)이라 하였는데 이는 송나라 주희의 무이구곡에 있는 대은봉(大隱峯)과 마주한 소은병을 본딴 것이다. 주희가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지어 은둔한 것처럼 윤선도는 보길도에 낙서재를 지어 은둔하였다. 낙서재 앞의 산이름은 ‘고사리 산’ 미산(薇山)이다. 고사리 산이라 함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은 백이숙제와 연결되니 그들의 절의를 기리고 그들처럼 살겠다는 뜻을 상징한다. 미산 옆 산봉우리를 혁희대(赫羲臺)라 하여 초나라 충신 굴원(屈原)과 연결된다. 낙서재에서 독서를 하며 제자를 가르치는 동안에도 불의한 세상에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주위 자연에 담았던 것이다.

낙서재(樂書齋). 윤선도는 보길도 격자봉 아래 잡목으로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낙서재(樂書齋). 윤선도는 보길도 격자봉 아래 잡목으로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사진=정유철 기자]

 

낙서재 맞은 편 산기슭에는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있다. 몇년 전 올라갈 때는 가파랐던 곳이데 이번에 가보니 힘들지 않다. 석실에 올라 앞을 내려다보면 먼 곳까지 보인다.  동천석실은 어떠한 곳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인간세계를 떠나 선계를 꿈꾼 곳이 동천석실이었다. 성종상 교수는 동천석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거처인 낙서재 맞은 편 산 중턱에 위치한 동천석실은 높다란 바위 절벽 위에 조성된 부용동 원림의 핵심 공간 중 하나이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한데 어울려 범상치 않은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극적인 요처에 해당하는 절벽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주변 바위들마다 은유 가득한 이름을 부여하며 상상의 세계를 꿈꾸었던 곳이다. 절벽 밑의 연못-석천石泉, 석담石潭을 눈 아래 두고 즐기면서, 멀리 산 아래로는 자신의 일상생활 공간을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산 아래 마을까지의 거리만큼이나 이미 인간세상과는 멀어져 있는 그곳에서 고산은 바위 위에 마련한 다조에 앉아 느긋이 차를 즐기면서 자신만의 별세계, 곧 선경을 즐겼을 것이다. 발아래 바위틈에 모아둔 물에 때때로 비취지는 하늘과 구름을 보노라면 자신은 구름 위에 높이 떠 올려와 있음을 새삼 재확인하면서 스스로 신선이 된 듯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곤 하였을 것이다.”(‘고산 윤선도 원림을 읽는다.’)

이러한 선계에 속인이 무시로 출입한다면 훼손될 터. 그래서 동천석실 앞 바위와 낙서재를 연결하는 동아줄을 걸어 음식물 등을 날랐다고 전한다. 그래서 윤선도가 동천석실이라 한 것은,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뜻으로 이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신선이 된 듯 신선의 처소를 만들고 그 세계를 즐겼던 것이다.

보길도에서 윤선도는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을 수시로 오가며 살았다. 그 모습은 인간계와 선계를 오가며 사는 것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