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甫吉島)를 이야기할 때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보길도라는 섬은 오래 전에 존재하였지만, 고산 윤선도로 인해 발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태어난 윤선도가 어찌하여 남해안 보길도라는 섬을 거처로 삼고 원림(園林)을 조성하였는가.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 서울 동부 연화방(蓮花坊) 집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총명하고 배우기를 잘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널리 읽었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 등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광해군 4년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윤선도는 4년 후 광해군 8년 진사로서 초야에서 상소를 올려 조정을 놀라게 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는 것과 의정 박승종(朴承宗)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저버린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로 인해 윤선도는 변방인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 이후 기장(機張)으로 옮겼는데, 그곳은 또한 동해(東海)의 한 모퉁이로 해가 뜨는 곳이다.

보길도(甫吉島)를 이야기할 때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원림을 조성하여 은거하며 신선을 꿈꿨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보길도(甫吉島)를 이야기할 때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원림을 조성하여 은거하며 신선을 꿈꿨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할 때 윤선도도 귀양살이 13년 만에 돌아왔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6년(1628)년 별시 초시에 장원을 하고 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윤선도는 교육과정을 엄하게 세워놓고 가르치는 내용은 《소학(小學)》을 기본 교재로 삼았다. 당시 《소학》은 금서였다. 윤선도는 학문을 강론할 때는 언제나 옛날 왕자들의 득실(得失)과 선악(善惡)을 인용하여 반복해서 곡진하게 가르쳤으므로 인조가 더욱 훌륭하게 여겼으며 왕자들 또한 더욱 존경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자리를 옮겨야 했으나 인조가 왕자들을 잘 가르친다고 여겨 5년 동안 옮겨 주지 않다가 임신년(1632, 인조10)이 되어서야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호조의 좌랑과 정랑, 사복시 첨정, 한성부 서윤도 함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제수되었으나 유언비어가 돌자 곧장 벼슬을 그만두었다. 1634년 성주(星州)의 현감이 되었고 이듬해 양전(量田) 문제를 논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미움을 받게 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더는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도는 강도(江都)로 가기 위해 고을의 젊은이들을 모집하고 집안의 노복 수백 명을 동원하여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갔다. 강도까지 수천 리 바닷길을 배를 타고 밤낮없이 신속하게 갔으나 도착하고 보니 성은 이미 며칠 전에 함락된 상태였고, 남한산성은 포위된 지 40여 일이나 되어 왕의 명령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에 내려오다 해남(海南)에 이르러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윤선도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을 결심으로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로 가는 도중 그는 수려한 산봉우리로 에워싸인 보길도를 지나게 되었다. 이 섬은 산과 내가 아름답고 아늑하여 그의 마음이 매혹되었다. 그대로 배에서 내서 격자봉에 올랐다. 그 영숙(靈淑)한 산기(山氣)와 기절한 수석을 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멈추는 것이 족하다”하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아 격자봉 아래 낙서재(樂書齋)를 지었다. 1637년 인조 15년 2월, 윤선도의 나이 51세였다.

인조 16년(1638) 사도시 정(司䆃寺正)과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 6월에 체포되어 병자호란 때 분문(奔問), 즉 난을 당한 왕에게 달려가서 문안이나 위문을 하지 않은 죄를 물어 영덕(盈德)에 귀양을 갔다. 1년 만에 석방되어 해남으로 돌아와 수정동에 정자를 짓고 이듬해 금쇄동(金鎖洞)에 지내면서 시문을 지었다.

인조 24년(1646)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내기 시작하여 효종 2년(1651) 가을 ‘어부사시사’ 4편을 지었다. 효종은 사부인 윤선도를 중용하려 하였으나 권신(權臣)들이 더욱 꺼려하여 쓸 수 없었다.

효종 10년(1659) 효종이 승하하자 좌상 심지원(沈之源)이 현종에게 아뢰어 윤선도를 불러서 산릉(山陵)의 일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수원(水原)에 길지(吉地)를 잡게 되자, 송시열과 송준길이 화를 내며, “산릉의 터를 잡는 일은 국가의 대사이니 윤선도의 말만을 전적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하여 마침내 산릉 터를 다시 잡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번엔 윤선도가 이를 따르지 않자 그들은 불경죄로 윤선도를 죄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이 이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윤선도가 사적으로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산릉을 옮기는 변고가 생기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15년이 지나 산릉 안이 붕괴되어 여주(驪州)로 개장(改葬)하였다. 효종 릉이 여주에 있는 이유이다.

제주로 가려던 윤선도는 보길도의 빼어난 승경에 반해 보길도에 머물리기로 한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제주로 가려던 윤선도는 보길도의 빼어난 승경에 반해 보길도에 머물리기로 한다.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이후 인조의 계비(조대비)의 복상(服喪) 문제로 남인의 대표로 서인 송시열, 송준길 등과 논쟁을 벌이다 삼수(三水)에 유배를 갔다. 그의 나이 일흔네 살이었다. 삼수는 북쪽 변방의 궁벽한 지역으로서 옛날 삼강(三江), 허천(虛川), 읍루(挹婁)의 땅이며 나중에 말갈(靺鞨)의 땅이 되기도 하였다. 추위가 빨리 오는 기후여서 오곡이 자라지 않고 청강(靑江) 바깥으로는 파저(婆豬) 등의 종족들이 예부터 살고 있었다. 유배지로는 최악이라 지금도 험한 고초를 겪을 때 “삼수갑산을 간다”는 말을 한다. 현종2년(1661) 가뭄이 들어 북청(北靑)으로 이배(移配)하려 하였으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방해로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1665년에 또다시 가뭄으로 인하여 광양(光陽)에 이배되었다. 이곳은 또한 남쪽 끝 바닷가로 풍토가 너무 나빠 몸이 마비되는 기괴한 질병이 돌았는데,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10에 8, 9는 죽어 나갔다.

현종 8년(1667) 특명으로 석방되어 그해 8월 해남으로 돌아왔다가 보길도 부용동에 우거하였다. 현종 11년(1670) 의곡(義穀)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현종 11년(1671) 6월 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바다로 들어간 지 5년 만의 일이다. 해남 문소동 고향 마을에 안장하였다. 그 이듬해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윤선도가 살았던 시기 조선은 정치·사회적 혼란기였다. 윤선도는 어려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었고, 중·장년기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조선의 지배층은 사화와 당쟁으로 점철되었고 윤선도는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다. 효종의 사부로 호시절이 있었으나 한 때였고, 성균관 유생이었던 시절부터 당대 권력의 핵심들을 규탄하는 올곧은 처신으로 관직생활은 험난했다. 85세로 죽을 때까지 20년씩 유배와 은둔 생활, 총 40년을 그늘에서 살았다. 그러한 윤선도에게 위안을 준 곳은 보길도를 비롯한 원림이었다. 세상이 버린 그를 보길도가 안아주었던 것이다.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근심을 삭히고 독서하며 자연과 하나되어 신선을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