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의 리더십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 G-0(zero, 零)라는 용어가 2011년 등장한 바 있다. 이는 어떠한 단일 국가 또는 국가군(國家群)도 국제적 의제를 추진할 충분한 정치, 경제적 역량과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한 세계, 곧 국제적 리더십 공백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미국, 중국, 그리고 유럽연합(EU) 등 어느 강대국이나 국가집단도 인류가 직면한 여러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같은 G-0의 국제적 리더십 상태는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을 잘 말해준다. 즉 범지구적 차원의 공동운명체 조건 속에 놓여 있으나 이에 부합하는 보편의 평화철학도, 또 이를 관리해 나갈 리더십도 부재한 상태, 이것이 바로 인류문명과 평화가 처해 있는 현주소이다.

G-0의 국제 리더십 상태는 모든 국가간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같은 인류 공동의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등 공존의 지구촌 건설에 기여하는 국가가 출현한다면, 그 국가가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나라로 부상할 수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김광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주지하듯이 현재 세계는 대체로 서구중심주의적이다. 지구는 둥글고, 따라서 지구에 중심과 주변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는 시ㆍ공간적으로 유럽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메르카토르 지도작성법(Mercator's projection), 곧 유럽의 영국 그리니치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를 중심으로 하는 경도 설정과 표준시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서구 문명의 핵심을 구성하는 특정종교의 인물 탄생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서기(西紀)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또 다른 주요 사례이다.

오늘날 서구 문명의 영향력은 이상과 같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시공간 개념과 틀을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구적인 것은 선진적 또는 보편적인 것이고 따라잡아야 할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동양적인 것은 후진적 또는 특수한 것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흐름이 여전히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적 기준, 선과 악의 기준 등은 물론 학계에 이르기까지 널리 확산되어, 사람들의 사유 체계와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란 애초 이러한 용어가 탄생될 때부터 상상의 경계선이자 편의적이고 인위적인 구분일 뿐이었다. 더구나 공동운명체화한 상호의존의 지구촌 또는 지구공동체 시대에 동서양 간 구분은 절대적인 구분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동양은 종교, 문화, 언어, 철학, 지리, 인종 등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며, 따라서 동질적인 하나로 보기에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지난 역사의 특정기간 동안 물질문명 차원에서 한동안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서구식 근대화를 의심없이 수용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는 지역이다. 즉 동양은 자신들보다 서구가 크게 진보해 있다고 간주하고 서구를 가능한 한 빨리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19세기 중반 동양이 서구로부터 자극받아 추진한 노선의 하나가 과학기술분야 등에서 서양을 따라잡고, 나아가 가능하면 앞지르겠다는 것이었다. 동양의 서구 따라잡기식 근대화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정치제도, 사법제도, 조세체계, 교통시스템 등 각종 제도의 구축에도 집중되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서구가 가진 물질적 우월성의 근본적 원인 및 그것이 지니는 문제점을 간과하였다. 19세기에 이미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던 근대의 근본적 문제점들을 간과하고 동양은 서구적 진보 개념과 물질주의 등 근대의 거의 모든 것을 비판없이 수용하였다.

즉 동양은, '서구는 선진이고 동양은 후진'이라는 획일적이고 순차적인 진보의 개념 하에, 서구 따라잡기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하면서 서구를 본따 삶 전체를 새로 주조하려 하였고, 자신의 고유 전통과 역사를 경시하거나 보존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렸다.

동양의 국가들 중 한국과 일본 등은 서구적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사례로 주목받게 되었고, 여타 동아시아국가들을 포함한 다수의 후발 국가들은 한국과 일본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하는 경우, 성공의 순간이 곧 공허함의 순간이 될 수밖에 없다.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 공허함과 만연된 소외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도농간 불평등, 환경 파괴 등의 현상이 근대화를 추구하는 아시아 국가 일반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나라들은 오랫동안 망각해 왔던 자존감 및 자아정체감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등 주요 나라들이 경제성장 및 이로 인한 자신감 회복과 더불어 서구문물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고 본래의 정체성과 문화 및 역사를 법고창신(法古創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과 부합하는 것으로, 서구문명과 동양문명간의 조화, 그리고 물질문명과 정신문명간에 조화를 이룬 새로운 문명시대로 나아가려는 동력이 지구촌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서구중심적인 것으로부터 동서양 문명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공존하고 상생하는 참다운 인류 보편의 지구촌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각성 또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문명사적 흐름 속에서 소통과 화해, 공감과 감성, 소프트 파워, 그리고 인류보편의 사상과 문화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천지인 합일의 정신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사상의 원류 홍익인간사상,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정신문화가 상생과 공존의 새 문명시대를 열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지평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27일 판문점에서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큰 폭의 첫걸음을 뗀 한민족이 그 국제적 위상을 객체에서 주체로 바꿀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21세기는 더 이상 서구만의 세기도 그렇다고 동양만의 세기도 아닌,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조화롭게 결합된 진정한 인류보편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조화로운 지구촌 실현을 목표로 하는 지구경영의 큰 길에서 한민족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홍익인간이라는 중심철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