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국립 단군성전이 없다. 서울 사직공원 내 단군성전은 현정회가 종로구와 위탁 계약으로 관리하고 있으나 실상은 공원 내 부속건물에 불과하다. 또한 대통령은 개천절 정부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마치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예수와 석가탄신일 행사에는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것과 비교된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들은 어떠했을까? 대표적으로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성군으로 유명하지만, 평양에 단군사당을 세웠다. 이어 세조는 역대 임금 최초로 단군전에 참배했다.

단군사당이 만들어진 배경은 단군과 기자에 대한 제사 논란에서 비롯됐다. 1425년 정척(鄭陟)은 단군이 기자묘에 배향된 데 문제를 제기했다.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으로 해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논의 끝에 1429년(세종 11)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가 건립됐다.

세조는 단군전 참배에 나섰다. 1460년 10월 4일 한양을 떠나 파주를 지나 개성을 거쳐 15일 평양에 도착했다. 17일 단군사당에서 친히 제사를 거행했다. 신주를 ‘조선시조단군’이라고 썼다. 김성환 박사(경기도박물관)는 “단군이 국조임을 공인한 것”이라며 “(친제는) 자신의 왕위계승이 고조선 단군과 이를 이은 고구려 동명왕을 계승했음을 승인받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단군의 이야기가 1〜2장으로 나온다. 반면 조선시대 사서(史書)는 단군의 치적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유희령(柳希齡, 1480〜1552)은 『표제음주동국사략』에서 단군은 성이 환씨, 이름은 왕검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단군의 죽음 이후 1500년의 기간을 세대를 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단군의 최후는 임금의 죽음인 ‘훙(薨)’으로 표현했고 송양(강동현)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조선 선조 대의 조여적趙汝籍(靑鶴, 생몰년 미상)은 『청학집』에서 환인과 단군으로 이어진 선도의 계보를 전했다. 이어 숙종 대 북애자北崖子(생몰년미상)는 『규원사화』에서 단군의 47대를 전한다. 그외 이의백(李宜白: 1711〜?)의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이 편찬됐다.

심지어 정유재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陶工)이 현지에 단군신사(=옥산궁)를 세웠다. 국조에 대한 인식이 당시 조선민 사이에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성환, <조선시대 단군묘 인식>, 경인문화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