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두산공원과 부산타워(사진=부산광역시 중구청)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산이라고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고 불렀다. 어느 때부턴가 산의 형태가 마치 용이 바다를 건너보며 일본을 삼킬 듯한 형세를 하고 있다고 하여 용두산(龍頭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의 머리가 있으니 꼬리가 있을 터.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산이 있으니 용미(龍尾山)산이다. 예전에는 호기산(呼崎山) 혹은 동산(東山), 무구산(無丘山)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용두산에서 민둥산으로 바뀐 사연?
 
주경업 부산민학회장은 “풍수상으로 용두는 입신양명(立身揚名)과 대성(大成)을 뜻한다. 과거 문과의 장원급제를 나타내는 상서로운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을 비롯하여 용두동, 용두리 등 이름이 우리나라 곳곳에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다. 주 회장은 “부산일보에 영남의 풍수를 연재한 장영훈은 중구의 형국을 ‘자리잡은 용이 여의주와 노는 모양’라고 칭하고 오랫동안 원도심 중구가 부산 16개 시군구의 중심이 된 것은 용두산을 중구가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용두산(龍頭山)은 해발 49m로 높지가 않다. 남포동 등 번화가에서 10분이면 오를 수가 있다. 공원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 ‘시민의 종’ 종각에서는 해마다 타종식이 열린다. 특히 높이 120m로 세워진 부산타워는 전망대로 일품이다. 민주공원, 영도대교, 자갈치시장, 오륙도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풍수설을 잘 모르더라도 부산의 중심지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과거 조선총독부가 용두산 정상에 신사를 세웠던 것도 이러한 풍수지리를 간파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주신(主神)이 용의 머리 위에 앉았으니, 한국인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는 일제가 전국 산천에 말뚝을 박아서 민족의 정기를 끊어버리려고 했던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광복 후 3개월이 지난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6시 용두산 신사에 불이 난다. 때마침 불어온 해풍을 맞으니 불은 순식간에 번지고 신사는 한 줌의 재가 되고 만다. 당시 민주중보 11월 19일 자에는 ‘용두산 신사 소멸, 방화 혐의 농후… 일인의 모략'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보도됐다.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사의 방화는 당시 37세의 열혈청년 민영석 씨가 감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민 씨는 일제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두 번이나 투옥되고 직장까지 잃었다. 그는 50년의 세월이 지나서 “시너를 두되들이 병에 담아 들고 불을 붙였다”고 공개적으로 방화 사실을 증언했다. 
 
이후에 또 한 번 불이 났다. 1954년 12월 10일 전쟁 이후 모여서 살고 있던 용두산 판자촌에 큰불이 났다. 소나무로 우거진 용두산은 민둥산이 되고 만다.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면서 그의 아호를 따서 우남공원이라 명명했다. 4.19 혁명 이후 용두산 공원으로 이름을 되찾았다. 현재 용두산 정상 팔각정 뒤 수풀 속에는 부산수화예방비가 있다. 
 
▲ 시민과 관광객들이 용두산공원을 거닐고 있다(사진=부산광역시 중구청)
 
부산 유일의 단군전
 
주목되는 것은 용두산 공원에 단군전을 건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강오 전북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재천(鄭載千)은 1914년 충북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전국에서) 단군전 건립운동이 일어났다. 정 씨도 국조 단군을 숭배하는 운동을 벌려 민족사상과 애국정신을 환기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1962년 5월 15일 시내 대신동에 임시로 건물을 마련하고 단군영정을 봉안했다.” 
 
정 씨는 단군 사당으로 머물지 않았다. 용두산 공원에 단군전을 세우자고 결의한 것. 동지들과 ‘대성조 단군숭안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반대자들의 냉담한 미소를 받았을 뿐 재원을 얻지 못하고 좌절했다”라는 것이 이 교수의 말이다. 만일 일본 신사를 허문 자리에 단군전을 세웠다면 부산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단군사당의 천단은 중앙에 단군영정을 모시고 별실에는 역대 개국시조를 봉안했다. 3월 어천절과 10월 개천절 양대 제례를 올렸다. 사당은 정 씨의 사비와 회원들의 성금으로 운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부산의 유일한 단군전’이라고 하지만 현재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 참고문헌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대산기획, 1992년
주경업, ‘부산학, 길 위에서 만나다’, 부산민학회, 2011년
주경업, ‘1928 그때 무슨 일이’, 부산중구청, 2013년
[문화 들춰보기] ③ '용두산 신사' 방화범은, 부산일보 2007년 1월 27일
 
■ 용두산공원 찾아가는 방법
 
부산지하철 남포동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10분이면 공원에 갈 수 있다.(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