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은 광복 73주년을 맞아 오는 15일까지 국민에게 한글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특별해설 ‘해설사와 함께하는 한글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1시에 진행된 특별해설에 참석한 기자는 위협받는 순간에도 한글을 지켜냈던 많은 이들의 노력을 알아보았다. 이와 관련된 유물도 관람하며 한글의 우수성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겼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1일부터 오는 15일까지 매일 오후 1시와 3시 광복절 73주년 기념 특별해설을 진행한다. [사진=김민석 기자]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1일부터 오는 15일까지 매일 오후 1시와 3시 광복절 73주년 기념 특별해설을 진행한다. [사진=김민석 기자]

해설은 우리의 문자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시작으로  40여 분간 이어졌다. 해례본은 지난 1940년 일제의 극심한 한글말살정책이 시행되고 있을 때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문자를 만든 목적과 그 원리가 밝혀져 있으며 자음과 모음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발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다 적혀있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을 반박할 수 있는 단서였다.

대일항쟁기 우리 문화재 수호에 전 재산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이 해례본을 지키기 위해 당시 기와집 열채를 살 수 있는 돈인 1만 원에 해례본을 사들였다. 한글을 통해 모든 국민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해례본이 아니었다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신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서양에서 도입된 신식 활판 인쇄기로 20세기 초에 발행된 ‘딱지본 소설’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표지가 알록달록해 ‘딱지본 소설’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콩쥐팥쥐전’, ‘춘향전’ 등 우리 민족의 전통 소설을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것이다. 암울했던 대일항쟁기에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며 일반인에게 한글을 전파했던 1등 공신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도입된 신식 활판 인쇄기로 발행된 딱지본 소설은 백성들에게 한글을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신식 활판 인쇄기로 발행된 딱지본 소설은 일반인에게 한글을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사진=김민석 기자]

이어서 우리말로 된 최초의 신문을 보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베델(한국명 배설)과 양기탁이 펴낸 최초의 한글 신문으로 혼란스러웠던 항일투쟁과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민중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신교육과 애국 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지난 1921년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보급할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꾼 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켰다. 이를 위해 ‘조선어 큰 사전’을 편찬해 한글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과 외래어에 대한 표기를 발표하였다.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33인의 조선어 학회 국어학자들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켜냈다. [사진=김민석 기자]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33인의 조선어 학회 국어학자들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켜냈다. [사진=김민석 기자]

사전 편찬을 위해 26,500여 장의 원고가 완성되었으나 1942년 대일항쟁기에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한글 연구를 한 학자들을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죄목으로 탄압하고 투옥시켰던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33인의 학자들이 검거되어 강제 해산되었다. 광복 후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원고가 발견되어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에 조선말 큰 사전 첫 권이 발간되었다. 10여 년간 총 6권이 완간되면서 사전 편찬 사업이 마무리 되었고, 이들은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해설을 통해 목숨을 걸고 우리의 문자인 한글을 지켜낸 선조들의 염원과 얼을 느껴볼 수 있었다. 모처럼 찾아온 여름 방학, 우리 문자 한글의 우수성과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