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가히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1,100여만 명, 명나라는 약 1억 5,000만 명, 일본은  2,200여만 명으로 조선의 두 배이었다. 임진왜란에 투입된 각국의 병력은 조선이 9만7,600여 명, 명나라가 19만1,000명, 일본이 34만 여 명으로 모두 약 63만 명이 된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일본 수군의 함선 수만 해도 800여 척이었다.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은 스페인의 무적함대 33척에 1만3천명, 넬슨(Horatio Nelson)이 이끄는 영국 함대 27척에, 9천명으로 함선이 총 60척, 병사가 1만2천명이었다. 1944년 6월 6일에 실시된 최대의 상륙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연합군 총20만 명이 동원되었다. 세계 전쟁사 중에서도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진 조, 명, 일의 명운을 건 세계적인 규모의 대전이었다.

▲ 1592년,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의 침공예상로. 1910년, 마침내 조선을 병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공로와 꼭 같다. 지금 또다시 ‘아베의 꿈’이 아닐 런지 의심하게 된다. 징비록의 마음으로 경계하고 난중일기의 심정으로 타개하여야 한다.


개전 초기 계속 도망만 다닌 조선의 '선조;를 비롯하여 지배층은 백성들의 신뢰를 잃고 갈수록 원성을 사게 된다. 백성들로부터 극도로 따돌림을 당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오직 대국 명나라의 권위에 결사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정권의 허약함을 모면하려고 하였다. 명나라에게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 곧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은 감사함을 명나라가 망한 뒤 청나라에게 복속당하면서도 견지하였다. 따라서 선조는 명군의 참전을 성사시킨 가장 큰 공로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굳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서애 유성룡, 이순신 장군 등과 의병들의 전장 터 ‘민관民官’의 고통과 영광을  위무하고 지원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신망이 높아짐을 시기하고 경계하고 질투를 하였다. 서얼과 의병 출신은 그가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 해도 단 한 명도 그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역대 조선 장군들 중 용력이 가장 출중하다는 김덕령 장군을 ‘이몽학의 난’에 연루 한 것으로 꾸며서 대역죄로 몰아간다. 결국 선조는 한때 가장 신임했던 김덕령 장군의 정강이뼈를 산산조각 내어 죽여 버린다. 이미 사형은 피할 길 없고, 어떻게 하던지 대역죄만은 면하여 다만 가족과 전우를 구원하고자 했던 ‘김덕령 장군의 읍소’는 처절하기만 하다.

"신이 이몽학과 함께 반역할 뜻이 있었다면, 당초 도원수의 명에 따라 어찌 이몽학을 치러 출병하였을 것이며, 또한 다시 명을 받고 그대로 군진(軍陣)에 돌아왔겠습니까. 다만 신이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 있다면, 계사년(1593) 에 모친상을 당했으나 3년 상을 치르지 못 한 채.... 상복을 전복으로 바꾸어 칼을 쥐고 나섰으나, 수년간 종군 끝에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충성도 없으면서 효도의 의리마저 어겼으니 차라리 그 죄로 신을 죽여주십시오."

그런가 하면 이쪽저쪽으로 쫒기는 백성들 사이에는 “왜군은 얼레 빗, 명군은 참 빗”이라는 속담이 퍼져 나간다. 개전 초반의 왜군은 전략적으로 조선의 백성들에게 식량을 퍼주는 등 잘 대해주었거니와 진격속도가 워낙 빨랐으므로 살아난 조선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도우러 온 명군은 점령군 행세를 극심하게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이 지나가면 마을의 닭, 돼지, 소 등은 물론 처자들이 남아나지 않았기에 생겨난 속담이었다. 명나라 원군들의 군량미를 제 때에 대줄 수 없었던 조선의 실상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앞장서서 뛰어 다닌 이가 바로 유성용으로 『징비록』은 명군의 군량미를 구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동분서주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일본군과 강화하여 피해를 줄이려는 명나라 사령관 이여송과의 첨예한 갈등과 약소국의 정승으로 받는 민망하고 처참한 경우도 진솔하게 적혀 있다. 그럼에도 한편, 유성룡은 예리한 안목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591년 임진왜란 발발 한 해 전, 유성룡은 비방을 무릅쓰고 권율과 이순신을 파격적인 직위로 천거한다.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두 사람은 훗날 육지와 바다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구하게 된다. 마음을 비운 사람의 소위 ‘신의 한 수’였다.
병법서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감탄을 받을 정도로 병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인 유성룡은 분명 문인임에도 무인의 최고 영예인 충(忠)의 시호(諡號)를 받아 ‘문충공(文忠公)’이 된다.
우리 한 민족의 변치 않는 지도자상인 ‘문무겸전의 영예’이다. 오는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탄신 470주년이다. 지금은 이 땅에 충무공과 문충공과 같은 후손들이 많이 나와야만 할 때이다.

(사)국학원 상임이사,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