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징비록懲毖錄'에서 왜군의 진격에 공포에 질려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망하려는 선조를 한사코 말리면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울부짖는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로!" 그런 서애를 뿌리치고 한양을 빠져나가면서 선조는 유성룡에게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제수한다. 말이 좋아 대장이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왕이 없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다가 뭇 백성들과 함께 죽으라는 복수에 사로잡힌 잔인한 인사 조치이다. 서애는 이미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도체찰사’였다.

▲ 국보 제132호 징비록.

임금의 시호에는 ‘태조太祖’와 ‘세종世宗’, ‘연산군燕山君’처럼 조祖, 종宗, 군君을 붙인다. 나라를 세웠거나 큰 위기에서 구한 왕들에게는 태조太祖처럼 조祖를 붙여주고, 덕치를 베푼 왕에게는 종宗을 붙인다. 노산군(단종), 연산군, 광해군처럼 신하들의 소위 ‘쿠테타’에 의하여 자리에서 물러난 왕은 ‘군君’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하늘이 내린 성군인 세종도 차마 조祖자를 붙이지 않았거늘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왕들을 선조, 인조라고 한다. 어찌된 평가인가? 선조는 자신이 후궁의 출신임을 늘 의식하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의심하였다. 자기의 아들인 광해군과 그 어떤 신하도 믿지 않고 저울질하였다.

 선조는 나름대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근검절약하며 명필로 소문난 왕재였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는 몰염치한 군주였고, 전쟁 앞에서는 공포에 질린 비겁자에 불과하였다. 절대 파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하더니 얼굴을 바꾸어 한양을 버리고, 개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의주까지 도피한다. 끝내는 ‘자신의 나라 조선’을 버리고 ‘상국 명나라’로 도피할 생각을 한다.
“내 반드시 압수(압록강)를 넘으리라.” 면서 장졸들의 결사 항전의 의지를 꺾기 다반사였다. 사대事大에 사로잡혀 명나라가 끝까지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던 암군이자, 분조分朝로 세자 광해군을 사지로 내몬 40세의 비정한 아버지였다.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에게 끝까지 힘을 실어 주지 않자, 명나라와 조선조정의 신하들도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결국 시들어 가는 명나라와 욱일승천하는 청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 외교로 국익을 챙기던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옥좌에서 굴러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판단착오로 40년도 지나지 않아 피내음이 채 가시지 못한 조선 땅은 또다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연이은 참극을 당한다. 청 태종 앞에서 인조 스스로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니 영원한 신하의 나라가 된다. 잔인한 청나라의 압제아래 신음하다가 1910년 결국 일본에게 36년간 완전히 나라를 빼앗긴다. 1945년, 겨우 나라를 되찾았으나 1950년엔 또 다시 우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싸움터가 된다. 형제들이 내몰려 총부리를 맞대니 6.25동란이라는 더 큰 비극으로 재현된다. 아름다운 국토의 허리는 동강나고 한 핏줄인 남과 북이 적대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 시대, 한무리 리더들의 잘못이 화를 눈덩이처럼 몰고 오는 것이 역사이다. 두고두고, 너나없이 늘 징비해야 할 이유이다.

▲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전戰’과 ‘란亂’은 의미와 크기가 다르다. 1차, 2차 ‘세계대전’처럼 외국과의 싸움은 ‘전戰’이고, ‘동학란’, ‘6.25 동란’같은 민족내의 다툼은 ‘란亂’이다. 우리는 지금도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바다건너 일본도, 만주의 여진족도 역사 속에서 같은 겨레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통하지 않는 역사의 정서적 연대감, 무사안일을 바라는 요행, 중국을 믿는 사대 속에서 전쟁의 참화를 예방할 골든타임을 매번 잃어버린 조선 조정이었다. 그런 리더들 속에서 생존의 위한 치열한 기록으로서 『징비록』과 『난중일기』가 태어난다. 실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붓을 쥔 장군, 유성룡 정승’과 ‘칼을 쥔 선비, 이순신 장군’의 절체절명의 한숨과 뜨거운 사랑의 기록인 ‘징비록’과 ‘난중일기’를 우리 모두 가슴으로 받아 아로새겨야 한다. 그리고 모처럼 드라마, 영화로 일어난 국민적 공감대를 ‘축복’으로 승화시켜 국난과 지구의 난을 대비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선진화, 세계화된 홍익의 나라로 발전해나가야 할 한민족의 책무를 ‘대한민국 조정과 백성들’은 이제는 결단코 징비하여야 한다. 지금, 여기가 아니면 우리에게 기회는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을 3회에 걸쳐 살펴볼 계획이다.

사)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