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이 1849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는 강화도에 있는 이원범을 즉위시키도록 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이원범은 철종이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고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었다. 

철종은 한양에 살았으나 헌종 10년(1844)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다 헌종의 승하로 보위에 오른 것이다.

조선 왕실은  1849년 6월 8일 이원범을 덕완군(德完君)에 봉하고 9일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즉위교서를 반포하였으나 '실록'에는 들어있지 않다.

철종은 19세였으나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즉위하던 날 대왕대비는 왕에게 언문으로 하교를 하였다.

"이렇게 망극한 일을 당한 속에서도 5백 년 종사(宗社)를 부탁할 사람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소. 주상은 영조(英祖)의 혈손으로서 지난날 어려움도 많았고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아왔으나, 옛날의 제왕 중에도 민간에서 생장한 이가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빠짐없이 알아서 정사를 하면서 매양 애민을 위주로 하여 끝내는 명주(明主)가 되었으니, 지금 주상도 백성들의 일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는 절검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비록 한 낱의 밥알이나 한 자의 베도 모두가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인 만큼, 만일 절검치 않는다면 그 피해는 즉각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고, 백성들이 살 수 없으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일념으로 가다듬어 ‘애민(愛民)’ 두 글자를 잊지 마오. 지난날의 공부가 어떠한지는 비록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옛일에 어둡고 옛일에 어두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슬프고 경황없는 중일지라도 수시로 유신(儒臣)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성현의 심법(心法)과 제왕의 치모(治謨)를 점차 익힌 연후에라야 처사가 옳바르게 되는 것이오. 위로 종사의 막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곤고를 보살펴 공경하고 조심하며, 검소하고 근간하여 만백성이 바라고 우러르는 뜻에 부응토록 하오. 임금이 비록 극히 존귀하다고는 하지만 본래부터 조정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법은 없으니, 대신들을 예로써 대하고 대신들이 아뢰는 데에는 옳치 않은 말이 없을 터이니, 정성을 기울여 잘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라오."

근검하고 애민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이날 조정의 관심은 임금의 공부에 죄다 쏠렸다.

이날 원상(院相) 권돈인(權敦仁)은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읽고 성충(聖衷)을 헤아려보면 역시 면려(勉勵)하고 조심하여 치법(治法)과 모유(謨猷)는 탕(湯)임금의 반명(盤銘)에 있는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日日新 又日新]’는 말보다 훨씬 더하시니, 신은 경축 만만(萬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영부사 조인영(趙寅永)은 "신의 생각으로는 이 언문의 면계(勉戒) 일편(一編)만을 항상 읽고 마음에 새겨 조심스레 행하면 이로써 자성(慈聖 : 대왕대비)의 뜻에 앙답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는 "지금 자성 전하께서 내리신 언문 교지를 보니, 우리 전하에게 훈계한 바가 글자마다 간측(懇惻)하고 말씀마다 절당(切當)하여 신은 반절도 채 못읽어서 감격한 눈물이 앞을 가리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언교(諺敎) 안의 ‘백성을 사랑하고 절검하라’는 말씀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여 부지런히 본받으라’는 말씀 등 앞뒤 몇가지 일들은 우리 전하께서 명심하고 행할 바 아님이 없으니, 빨리 이 언교대로 새겨서 행하시면 후일 전하의 치공(治功)과 선화(宣化)가 여기에서 기초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판부사 정원용(鄭元容)은 철종에게 무슨 공부를 했느냐고 묻는다.

"신은 이틀 동안 모시고 오면서 전일에 무슨 책을 읽으셨는지 알고 싶었으나 노차(路次)라서 감히 여쭈어 보지를 못했었는데, 이제는 여쭈어 볼 수 있습니다."

권돈인은 "이제부터는 여러 대신들이 아뢴 뒤에는 꼭 대답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압박한다.

철종은 "일찍이 '통감(通鑑)' 두 권과 '소학(小學)' 1, 2권을 읽었었으나, 근년에는 읽은 것이 없오."라고 하였다.

 조인영이 아뢰기를, "독서와 강리(講理)는 참으로 성덕(聖德)을 이루는 근본이 됩니다. 만약 이미 배운 몇 편에 항상 온역(溫繹)을 더하여 힘써 행하고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옛부터 지금까지 성현(聖賢)의 천언 만어(千言萬語)가 어찌 '소학' 한 편의 취지에 벗어남이 있겠습니까?"한다.

철종이 다시 "그러나 어렸을 때에 범연히 읽어 넘겼으니, 지금은 깜깜하여 기억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대왕 대비가 끼어들어 말한다.

"만일 글을 읽는다면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하겠소?"

"시작은 '사략(史略)'으로부터 하여 조금 문리(文理)를 이해케 된 뒤에 계속하여 경서(經書)를 배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원용이 말했다. 

철종이 즉위하던 날, '실록'에서는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왕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