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대왕이 재위 34년만에 승하하였다.  순조에게는 효명세자가 있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효명세자의 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순조가 승하할 무렵 세손은 여덟 살이었다. 8세에 임금이 된 헌종. 보위에 올랐으나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위에 앞서 수렴청정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당시 왕실 어른은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였다. 

헌종은 1834년 11월 18일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예(禮)를 흥정당(興政堂)에서 행하고, 조하(朝賀)를 받은 다음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대사(大赦)를 베풀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실록'에는 헌종의 즉위교서가 보이지 않는다.

 수렴청정을 한 지 한 달정도 지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조정의 대신들에게 일렀다. 
 
"미망인은 깊은 궁궐 안의 한 부인에 지나지 않으나 대행왕(大行王: 순조)의 건즐(巾櫛)을 받들어 온 지가 30여 년인데, 이제 천지가 무너지는 화변(禍變)을 당하였다. 주상(헌종)이 비록 타고난 자질이 영명(英明)하다 하더라도 아직 10세 이전이라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하나하나 책임지우고 바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경(卿) 등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간곡히 청하기 때문에 만부득이 이런 거조(擧措)가 있기에 이른 것이나, 본래 여자란 학문과 식견이 없다. 경 등은 나라의 대신(大臣)으로서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해 왔고 대행조(大行朝) 때 지우(知遇)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니, 오늘날 유유(悠悠)한 만사(萬事) 속에 주상을 보호하고 성학(聖學)을 권면(勸勉)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백성을 애휼(愛恤)할 일이다.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한다면 먼저 조정(朝廷)부터 거조(擧措)의 마땅함을 얻어야 할 것이니, 묘당(廟堂)에서는 방백(方伯)을 권면하여 경계하도록 하고 방백은 수령(守令)을 단속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탐욕의 폐단을 없게 할 것이다. 그러면 백성은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고, 백성이 편안해지면 국세(國勢)는 다시 반석(盤石)·태산(泰山)과 같은 안정된 자리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도리로는 위아래에서 들뜨고 꾸미는 것을 모두 없애고 성실한 마음을 가지고 착실한 정사를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지금을 시작으로 모든 군국(軍國) 대사(大事)를 대신과 경재(卿宰)가 충분하게 상확(商確)하여 타당하게 한 뒤 아뢰면, 나는 오직 따를 뿐이다. 만약 시행할 수 없거나 긴요하지 않은 일은 처음부터 거론하지 말아서 수응하는 데 번거롭게 만들지 말 것이다.

  이처럼 환히 유시(諭示)한 뒤에 경 등이 만약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어린 주상을 보필하지 않는다면, 이는 경 등이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靈)을 저버리는 것이요, 허물이 내게 있다면 이는 내가 조종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루 이틀 1년 2년을 이와 같이 하여 지내 점차 주상이 장성한 뒤에 가서 조정이 안정되고 백성과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면, 이 미망인도 돌아가 뵐 낯이 있을 것이요, 경 등도 또한 선왕을 추모하여 금상(今上 : 헌종)에게 보답하는 책무를 다하게 될 것이다. 나의 말은 여기에서 그치니, 각자 힘쓸지어다."

  대왕대비가 수렴 청정에 임하면서 조정 신하들에게 당부한 내용으로 수렴 청정에 임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순조비 순원왕후의 수렴 청정은 헌종이 열네 살 되던 해 끝났다. 7년간 수렴 청정을 한 것이다.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올라 왕권이 매우 약해진 시기. '실록'의 기록도 빈약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