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익운의 사상

심익운의 문집으로 <백일집(百一集)>이 있다. 저자는 14, 5세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약관에 진사가 되었고, 한(漢)·위(魏)의 고체시와 성당(盛唐)의 신체시를 두루 배워, 신작(神作)으로 일컬어진 수천 수의 시를 지었으나,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선별한 원숙한 작품들만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잡저(雜著) 편에는 그의 학문관·정치관·인생관 등을 표명한 글들이 전해진다. <학수(學守)〉에서는 학문에서 경(經)·예(禮)·문(文)·사(史)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장사치의 학문이라고 비판하고,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을 전공할 것을 강조하였다. 〈삼계(三戒)〉에서는 외환(外患)이 많은 것은 국가의 경사이며, 빈천한 것은 집안의 다행이며, 괴로움이 많은 것은 일신의 복이라고 역설적으로 논하였다. 〈삼적〉에서는 모든 난(亂)의 시초가 3적(賊), 즉 향당(鄕黨)·주군(州郡)·조정(朝廷)에 있다 하고 모두가 이익만 탐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하였다. 또, 나라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군주와 경대부가 검소하고 부유한 자들이 절용해야 하며, 토지소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논정(論政)〉에서는 정치의 강령으로 백성을 부유하게 함과 겸손의 덕과 신뢰할만한 법을 강조하였다. 〈설문(說文)〉은 문장론으로, 첫째 근원, 둘째 주제, 셋째 규범, 넷째 불가측한 신운(神韻)이 요점이라고 하였다. 〈대소설(大小說)〉은 당시의 정치 세태를 풍자한 글로, 큰 현인은 묻혀 지내고 작은 재사가 등용되며, 큰 죄는 빠져나가고 작은 죄는 처벌받는 아이러니를 지적했다. 〈백일축〉은 세속의 유아 백일 행사가 미신적인 풍속이 아니라, 예부터 전래된 전통 있는 유교 행사임을 밝힌 흥미로운 글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윷놀이의 경전 사희경의 내용

윷놀이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칭송한 사희경(柶戱經)은 조선시대 윷에 관한 대표작중의 하나이다. 사희경에는 도·개·걸·윷·모 등에 대한 설명, 윷가락의 색깔, 윷놀이의 방법 및 윷판과 행마법(行馬法) 등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다. 사희경이 수록된 <강천각소하록(江天閣銷夏錄)>은 조선 후기 심익운이 여러 사람의 묘지·제문·시·서·잡설 등 여러 가지 양식의 글을 임의로 뽑아 엮은 잡록(雜錄)으로 1책(47장) 한문필사본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현재거사묘지(玄齋居士墓志)〉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죽은 뒤이니, 심익운의 나이 36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록된 글 중 <제이동서(題李童書)〉는 이용휴(李用休), 〈조씨타호구린기(趙氏打虎救隣記)〉는 왕백유(王白瑜〉, 〈동국악부〉는 이광사(李匡師)의 글이다. 다른 사람의 글에 글쓴이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보아 글쓴이가 적히지 않은 <사희경>은 심익운 자신의 저술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심익운보다 50년 뒤에 이규경이 심익운의 사희경을 언급한 바 있으나, 사희경이 심익운의 글인지 아닌지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어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사희경의 끝에 두 아들에게 고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족보를 찾아보면 심익운은 슬하에 2남2녀를 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사희경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심익운의 작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간접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이 두 아들이 그의 아들이라고 전제한다면 사희경의 저술연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장자는 계미(1763)생 정축(1817)졸이고 차자는 갑오(1774)생이다. 장자는 심익운이 30세에, 차자는 41세에 얻었다. 그렇다면 사희경은 앞에서 심사정 사후(1769년 졸)로 심익운의 나이 36세 이후라고 했는데, 심익운에게 두 아들이 생긴 것은 1774년 41세 이후이니, 이때부터 1783년 50세로 졸할 때까지의 장년의 나이로 어쩌면 유배중의 말년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리해보면, 심익운은 조선시대 명문가인 청송 심씨 가문에서 태어나고 문과에 장원급제까지 하였으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됨으로 말미암아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는 가화(家禍)에 연루되어 평생을 평탄치 못하게 살다가 귀양지 제주에서 죽음으로써 불우한 문사의 전형이 되었다. 족보를 보면 그의 자녀에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인으로 폐출되면서 과거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차자는 졸년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서인으로 폐출되어 유배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친 불우한 생애로 인해 가세가 기운 탓일 것이다. 그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장원 급제자였으나 명교(名敎)의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당했다. 이것은 조선의 르네상스로 일컫는 영정조 시대의 아이러니였다.

사희경(柶戱經) : 윷놀이 경전

사희경에는 대문(大文)과 주석이 있다. 본고에서는 일단 대문만을 게재해서 감상하도록 한다.

有戱於此 非博非奕 折杻爲籌 畫紙成局
여기에 놀이가 있으니 장기도 바둑도 아니라, 싸리나무 잘라서 가락을 만들고 종이에 그려 판을 만드네.

籌四如一 外赤內白 奇耦參會 貳純重擲
네 가락 똑같은데, 겉은 붉고 안은 희도다. 홑․짝이 섞이며, 모두 엎어지거나 잦혀지면 다시 던지네.

中局而孔 四通七列 圜爲二十 間絡四穴
윷판은 중심의 구멍은 사방으로 통하여 일곱 개씩 벌려있고, 둘레는 스무 칸 네 혈처를 두르고 있네.

四馬並馳 或乘或匹 利則留止 害不掩食
네 말이 같이 달리는데 올라타기도 하고 짝을 짓기도 하며, 유리하면 멈추기도 하고 해로우면 잡아먹지 않기도 하는구나.

有出有入 有順無逆 徐疾旣殊 輸嬴斯卜
들고 나지만 따라는 가도 거슬러가지는 못하도다. 느리고 빠름이 달라지니 이로써 이길지 질지를 점치네.

維局象天 中作樞極 二十八舍 其機內斡
판은 하늘을 본떠서 중심은 북두성 축이 되어, 스물여덟 개의 집이 그 틀 안에서 돌아가네.

維籌象易 陰陽九六. 有變不變 於焉消息
윷가락은 역(易)을 본뜨니, 음과 양은 9와 6이라, 변했다가 불변하니 줄었다가 불어나네.

其具已集 其事易決. 巧拙隨手 用舍在臆.
도구가 갖춰지면 일은 쉽게 결판나니, 교묘함과 서투름은 손놀림을 따르고, 쓰이고 버려짐은 생각하기에 달려있네.

歲暮明燈 時夜風雪 布局投籌 婦嬬競謔
섣달그믐 등 밝히고 눈보라 치는 밤에 판벌리고 윷 던지며 아녀자들 다투며 즐거워라.

理寓於數 數以器察 告我二子 敬受此述
이치는 수(數)에 부쳐있으니, 수로써 사물들을 살펴보라. 이르노니 두 아들아, 이 글을 공경히 받으라.

임채우(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교수, 한국윷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