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명의 선비 김문표

전통시대에 윷을 학문으로 연구해서 그 철학적 의미를 밝힌 가장 대표적인 학자는 김문표(金文豹, 1568∼1608)이다. 그의 「사도설柶圖說」은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나온 윷에 관한 저술로서 김육(金堉, 1580∼1658)의 『송도지松都志』에 실려 있다. 김문표와 김육의 관계는 자세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김육이 송도의 읍지를 찬술하면서 송도 지역 학자들을 소개하였고, 송도 출신의 김문표라는 무명의 학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문표의 생애와 활동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김육은『잠곡필담潛谷筆談』에서 말하기를 “松京(개성)의 문인으로 수학에 통달하여 사설柶說을 지어서 상학象學과 수학數學의 이치를 가지고 풀었는데 그 설이 심히 뛰어났다”고만 했다. 또 19세기에 (쓰여)씌어진 󰡔중경지󰡕에도 그에 관해 일부의 기록이 남아 있다. 김문표는 청풍김씨로 자는 비경(斐卿)이고 호는 호연정(浩然亭)인데, 천성이 질박하고 학업에 열중했으며 특히 수학에 능통했다고 전한다. 또 󰡔조선시대사찬읍지󰡕에는 “조선 선조 원년(1568) 급제하였고 수학數學에 능통하였던 호연정浩然亭 金文豹가 있는데, 허도낙서설河圖洛書說과 쌍륙도설雙陸圖說 및 조석潮汐이 천지의 호흡이라는 潮汐說, 말은 양이고 소는 음이라는 牛馬說 등도 남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의 쌍륙도설이 사도설 중에 보이고 있으니 김문표에 관한 내용이 맞는 듯한데, 그러나 과거급제 연도인 1568년은 김문표의 출생년도이니, 연도상에서든 뭔가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김문표와 같은 이름이 󰡔國朝文科榜目󰡕에 선조 9년(1576) 丙子 式年試 乙科에 7위로 급제한 기록이 있으나, 이렇게 되면 그가 8살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셈이 되니, 이것도 시대가 맞지 않아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2. 김문표의 사도설

김문표는 사도설이란 글을 써서 윷판과 윷놀이에 철학적인 설명을 붙였다. 여기에는 음양오행과 천문역법을 근거로 우리의 윷놀이의 의미를 깊이 분석하였다. 그러면 조선시대 윷에 관해 최초의 철학적 설명을 남긴 김문표의 사도설을 한번 감상해보도록 하자.

▲ <松都志>(1648)에 실린 김문표의 윷판을 설명한 그림> <자료=임채우 교수>

"윷을 만든 분은 도를 알고 있었으리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니 건곤이 정해지며, 성신星辰엔 궤도가 있어 경위經緯가 세워지며, 태양의 운행에 법도가 있으니 밤낮이 나눠진다. 그러나 하늘은 지극히 높고 성신은 지극히 멀어 선기옥형의 圖나 혼천의 儀로 미뤄서 헤아려야만 알 수 있다. 지극히 간단하면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윷뿐이로다!

윷의 밖은 둥글어 하늘을 상징하고 안은 네모져서 땅을 상징하니 하늘이 땅의 밖을 둘러싸고 있으며, 중심에 있는 별은 북극성이고 곁에 벌려진 별들은 28수이니, 곧 북극성이 제자리에 거하고 뭇별들이 그를 싸안고 있는 것이다. 태양은 水에서 나와 木으로 들어간 다음 土에 머물다가 돌아온다. 수에서 나오는 것은 동지의 낮이 짧고, 수에서 목으로 들어갔다가 질러서 金으로 운행했다가, 다시 수에서 나오는 것은 춘분의 낮이 중간이 되는 것이다. 수에서 나와 목을 거쳐 火로들어갔다가 직행해서 수에서 나오는 것은 추분의 밤이 중간이 되는 것이며, 수에서 나와 목을 거치고 화를 거쳤다가 다시 수로 나오는 것은 하지의 낮이 가장 긴 것에 해당한다.

윷의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이요 아래가 네모난 것은 땅이니 한번 엎어지고 한번 잦혀져서 천지가 나누어진다. 넷을 사용하는 것은 땅의 수요 5를 쓰는 것은 하늘의 수이다. 4와 5가 서로 곱해져서 오행이 운행되며 사시가 이루어진다. 말이 直方함은 땅의 體이고, 4시로 행하는 것은 음의 用이다.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양이 아니면 生할 수 없고 음이 아니면 成할 수가 없는 법이라, 천도는 양을 위주로 하지만 음이 없을 수 없고, 지도 또한 그렇다. 쌍육의 주사위는 네모지고 짝이 되고, 말은 둥글고 홀수이니 이 한 물건에 지극한 이치가 있다.

두 사람이 짝이 되어 번갈아 던지는데, 高農이 이기면 山田이 잘 익고 汚農이 이기면 海田이 잘 익게 된다. 반드시 세시에 노는 것은 천신을 점쳐 한 해의 풍흉을 점치기 때문이다.
천하의 사물은 각기 서로 대대對待하는 이치를 갖고 있지 않음이 없다. 河水에서 龍馬가 圖를 지고 나오자 洛水에서는 神龜가 書를 바쳤다. 이는 道를 표현하는 도구이다. 장기가 만들어지자 바둑이 나오게 되었으니, 장기는 野戰의 모습이라면 바둑은 攻城의 형상이다. 이들의 기교가 비록 자잘하지만 또한 견문이 높은 장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윷을 만든 이는 도(道)를 알고 있는 분이라고 극찬하면서, 윷판을 하나의 천문도로 보고 여기에 태양의 주기와 음양오행의 이치를 붙여 설명했다. 그리고 윷놀이로 한해의 풍흉을 점치던 민속까지 기록해두어, 당시까지 나온 윷에 관한 기록 중에서는 가장 체계적이고도 깊이 있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윷놀이는 하늘을 본 뜬 것인데, 쌍륙은 땅을 본받았다고 하여 윷과 쌍륙을 한 쌍으로 비교해 설명하고, 장기와 바둑까지도 같이 비교 분석하면서, 이 놀이 도구 속에 담긴 깊은 이치를 해명하여, 이런 놀이를 천시했던 당시의 완고한 양반들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현존하는 윷에 관한 설명으로는 이 사도설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후 조선시대 학자들의 윷에 관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교수, 한국윷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