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윷에 관해 연구한 자료로는 김문표의 사도설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 조선 후기의 문신 심익운(沈翼雲, 1734 영조 10∼1783)의 '사희경(柶戱經)'이다. 이 둘은 윷을 철학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한 성과로서, 민속학적 시각에서 쓰여진 유득공의 <경도잡지> 및 이규경의 <사희변증설>과 더불어 윷놀이의 주요한 문헌자료이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사희경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이도 있지만, 사실 '사희경'은 현재 <강천각소하록(江天閣銷夏錄)>속에 전문이 전한다.

장원 급제자의 불행

심익운은 청송(靑松) 심씨로 자는 붕여(鵬如), 호는 지산(芝山)이었다. 소론 명문가 자제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으나 아버지(一鎭)가 영조 역모에 연루된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인 심사순(沈師淳)에게 양자로 입적하여 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심익운이 과거에 장원급제하고서도 청환직(淸宦職)에 서임될 수 없다는 반대를 받자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가 양자로 입적된 사실을 없애려다가 인륜을 어지럽히는 일가로 지목되어 사류(士類)의 탄핵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어 유배되었다가 생을 마쳤다. 이 일로 인해 그의 작품은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남은 글도 그의 이름이 삭제 당했다.

 

안대회 교수는 “그의 작품은 그가 34세 때 스스로 편집한<백일시집(百一詩集)>, <백일문집(百一文集)>각 1권씩이 전해질 뿐이며, 그 이후의 작품을 정돈한 작품집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34세 이후에 쓴 글이 몇몇 선집에 단편적으로 전해져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불우한 문인의 영혼을 기억하게 만든다.”고 했는데, <강천각소하록>은 그 뒤 40대 이후의 작품들이 수록된 선집이다.

파란만장한 생애

심익운의 생애는 행불행의 양극단을 오갔다. 그는 21세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26세에 문과에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문과 장원 급제자로서 그는 이조좌랑이라는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그의 부친 심일진(沈一鎭)이 영조(英祖)를 반대하여 역적으로 처벌된 심익창(沈益昌)의 아들 심사순(沈師淳)의 양자로 입적된 사실 때문에 노론의 공격을 받았다. 심익운과 그의 형 심상운(沈翔雲)의 벼슬 임명 문제는 영조 말년 큰 물의의 하나로 실록에 등장한다. 이 문제로 집안이 폐족의 위기에 몰리자 심일진은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사실 심사순이 처벌받은 것은 생부인 심익창의 역모에 연좌된 결과였으나 그는 이전에 효종의 부마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의 양자로 출계한 상태였다. 그래서 심일진은 자신들이 청평위와 숙명공주(淑明公主)의 제사를 받들 적임자라고 하여 자신의 생부 심중은(沈重殷)을 청평위의 후계로 바꾸어 달라는 단자를 혈서로 써서 예조에 올렸다. 그런데 이 때 심익운이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것이 다시 물의를 일으켰다. 이 일은 홍봉한 등의 후원으로 심일진이 청평위의 제사를 받드는 것으로 낙착되었고, 그는 지평(持平) 등의 직책에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심익운의 형 상운이 1776년에 대리 청정하는 세손(世孫, 후에 정조가 됨)을 문제 삼는 글을 올렸다가, 이로 인해 청평위의 제사를 받드는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뒤 상운이 처형되고, 심익운은 형의 죄에 연좌되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 대정현에서 죽었다. 성대중(成大中)은<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심익운은 절세(絶世)의 재사다. 그 아버지 심일진은 평범한 사람으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가 상운이고, 둘째가 익운이며 , 막내가 영운(領雲)이다. 형제가 서로를 사우(師友)로 삼아 그 시문이 모두 오묘한데 그 가운데 익운이 가장 기묘하다. 상운과 익운 모두 소과, 대과를 합격하였으나 집안일에 연루되어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하자 익운은 분함을 못 이겨 드디어 손가락 하나를 찍어서 자포자기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의 시에서는 더욱 감개가 담기게 되었고, 험하고 궁벽해졌으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많았다. 재주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그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많았다.”

정조시대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제 뜻을 펼쳤으나 심익운 형제만은 재주 때문에 화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고 성대중은 애석해 했다. 그래서 심익운의 장년 이후의 시문은 좌절한 문인의 독설을 표현하고, 세태를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이 많다.(이상 안대회, <문학과 경계>, 2002년 여름호 통권 5호 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심익운의 졸년이 미상으로 되어있으나, 필자가 청송심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심익운은 청송심씨 참봉공파 19세손이고 갑인생으로 계묘 정월14일 졸로 기록되어 있다. 계묘년이면 1783년이니, 향년 50세 장년의 나이로 제주도 유배 중에 불우한 생을 마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