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명의 선비 김문표를 알아준 영의정 김육
김문표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벼슬을 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 급제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 개성에 살던 무명의 선비 김문표를 알아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의정 김육(金堉, 1580 선조 13∼1658 효종 9)이었다.
1648년 당시 개성유수였던 김육이 개성 최초의 지지인 '송도지'를 만들었는데, 개성의 인물편에 김문표의 사도설을 전문 게재하여 그의 윷판 철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육의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으로 대사성·대제학·대사간·대사헌 및 영의정 등을 지냈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가,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 청덕동에 은거하여 홀로 학문을 닦았다. 이런 연유로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김육이 43세 되던 1623년에 서인의 주동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났는데, 반정이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올렸다. 이때 서인정권과는 거리가 있었던 김육도 같이 조정에 출사하여,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증광 문과에 응시해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정권핵심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승진은 빠르지 않았다. 60세가 넘은 나이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대사헌을 제수 받았다. 병자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지자, 인조는 민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김육을 대사헌에서 파격적으로 우의정에 임명했다. 1650년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이 때 이미 그의 나이 70세 고령이었으나 이후 화폐개혁과 대동법 실시 등 민생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며, 76세에 영의정에 올랐다가 곧 7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속고 潛谷續稿≫가 전한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淸風世稿≫·≪조천일기 朝天日記≫·≪기묘록 己卯錄≫·≪잠곡필담 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 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 집에 술 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외에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했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홀로 제향되었다.
4. 백성의 친구 김육
그는 58세 되던 163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였고,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다시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는 도중에 별세하였는데, 대동법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후에 이뤄졌다. 그는 목민관시절에 수차(水車 :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흉년이나 질병을 구제하기 위한 ≪구황촬요 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 등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노력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구황촬요≫·≪벽온방≫·≪종덕신편≫ 등은 목민관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방책으로서, 그의 위민(爲民) 사상을 보여준다.
그는 이와 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육은 조선의 500년 역사에서 과소평가된 인물이다. 그는 왜란과 호란으로 국가 전체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무엇보다 민생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참으로 민심이 천심이고 백성의 배고픔이 왕명보다 무서움을 알았던 인물이다. 당시 지식사회의 주류는 예론(禮論)이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사대부들은 선비로서 예를 지키고 지조를 지키면 된다는 생각이었지, 백성들의 삶이야 어떻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이다. 특히 예론에 빠져있던 사대부출신의 정치가들은 김육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대부분의 민생정책을 반대함으로써 백성들은 더욱 곤궁에 빠졌다. 김육의 생각은 실학자들에게 이어졌지만, 사실 실학자들은 대부분이 벼슬을 단념한 선비들이라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육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까지 오른 고위공직자였다. 그는 배고픔을 잊지 않았던 진정한 정치가였고, 백성들의 신산한 삶을 이해하고 도와주려했던 백성의 친구였다. 왜란과 호란이란 미증유의 난리 통에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었건만, 상복을 1년을 입는지 3년을 입어야하는지를 가지고 수만 명의 지식인들이 당을 갈라서 목숨을 걸고 당쟁을 벌일 적에 그는 균역법과 대동법의 실천방안을 통해, 민중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시린 등을 따습게 해줄 실제적인 대책을 찾았다.
훗날 영의정까지 오른 자리에서도 민중의 신산한 삶을 위로해주던 윷놀이에 관심을 기울였고, 김문표와 같은 이름 없는 선비의 윷판에 대한 해석에 무릎을 치고 탄복하며 그 글을 정리해서 후세에 전한 참다운 학자이기도 했다. 김육이 있음으로써, 김문표라는 무명의 선비가 홀로 연구해낸 윷판 철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윷판을 불태워버리라고 멸시하던 조선의 경직된 지식사회에서 한줄기 빛을 남기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남인 실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사도설은 윷판과 윷놀이 연구에 근거자료이자 전고(典故)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이름 없는 개성의 선비 김문표의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학문의 융합이자 민중들의 삶을 이해할 줄 알았던 김육의 안목에 힘입은 결과였다.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교수, 한국윷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