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금귀걸이 등 왕실유물, 태국산 청옥‧황옥도 활발한 대외교역 확인
- 일제강점기 도굴된 채 첫 발굴 후 96년 만인 2023년부터 재조사 결과
- 법의학 동원해 발굴된 2개의 청소년 어금니로 왕릉의 주인공 밝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호분의 주인공이 백제 개로왕의 손자로, 13세에 어버지 문주왕을 시해한 좌평 해구에 의해 즉위해 반란과 재해의 혼란 속에 살다 3년 만에 죽은 비운의 소년왕 ‘삼근왕(三斤王, 재위 477~479)’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호분 속 화려한 금귀걸이와 함께 출토된 어금니 2점이 법의학 분석 결과 10대 중후반 청소년의 것으로 밝혀져 유일한 10대 소년왕이자 백제 21대 개로왕의 직계 손자인 삼근왕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일제강점기 도굴된 상태로 발견되어 조사가 진행된 후 96년 만인 2023년 9월부터 왕릉원 1기~4호분 재조사에 들어가 지난 6월 17일 새롭게 밝혀낸 재조사 성과를 발표했다.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던 475년부터 538년까지의 왕들의 묘역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중 왕릉원은 무령왕릉 묘역과 구분되어 북동쪽에 위치했으며, 동쪽부터 1호, 2호, 3호, 4호분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번 재조사를 통해 백제 웅진 초기의 혼란했던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럼에도 웅진기 백제가 굳건한 정치체계와 활발한 대외교역을 유지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주요 단서들이 밝혀졌다.
먼저,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 무덤이 내부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 강자갈을 채웠다는 공통점이 밝혀졌다. 특히, 왕릉원 1~4호분은 사전에 수립된 계획에 따라 경사면을 깎아내고 동쪽부터 순서대로 조성되었으며, 지하의 굴식 돌방무덤은 네 벽이 좁아져 천장을 돌 한 장으로 덮는 궁륭식 구조를 보였다.
가장 주목할 성과는 2호분에서 발굴된 화려한 유물들이다. 특히, 청색 유리옥이 달리 정교한 금 귀걸이는 백제 초창기인 한성기의 귀걸이와 웅진 후반기인 무령왕릉의 왕비 귀걸이의 중간 형태를 보여 2호분의 주인이 웅진 초기 재위 사실과 백제 왕실의 수준 높은 금 세공기술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은에 줄무늬를 새기고 금을 도금한 반지는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비슷한 형태가 발견되어 웅진 초기 백제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칼 손잡이의 오각형 고리 장식은 나주, 논산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 백제가 지방 수장층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수습된 1,000여 점의 유리옥 중 황색과 청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이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태국이 생산지로 분석되어 당시 동남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해 운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출토한 어금니의 법의학 분석에 따라 2호분의 주인이 삼근왕일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1~4호분에 묻힌 인물도 개로왕의 직계인 문주왕과 삼근왕을 비롯해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들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삼근왕은 백제가 공주에 도읍한 웅진기(475년~538년) 초기에 재위한 23대 왕으로, 사냥터에서 시해당한 문주왕의 맏아들이었다. 즉위 후 부왕을 시해한 좌평 해구가 권력을 장악했다가 이듬해 관등 은솔과 반란을 일으키자, 삼근왕은 두 번 군사를 보내 끝내 진압해 해구는 죽고 은솔은 고구려로 도주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그 이후 일식과 즉위 3년에 봄과 여름의 큰 가뭄, 그리고 한성백제기 왕비 집안이자 좌평 해구를 배출한 해씨 가문의 근거지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는 기록과 즉위 3년 11월 15세에 죽었다는 기록뿐이다.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측은 “조사 성과를 통해 웅진 초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정치체계와 대외 교역망이 굳건히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웅진 후반기 무령왕이 ‘갱위강국(更爲康國,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고 성왕이 사비로 천도해 한층 성숙한 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오는 18일과 19일 오전 11시 발굴 현장에서 일반 국민 대상 공개설명회를 진행한다.
또한, 국가유산청 유튜브 채널에서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2호분에 관한 소개영상 2편과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최초로 공개한 1971년 무령왕릉 발굴 현장의 긴박한 상황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에서 발췌한 음성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녹음 기록은 공주에 거주하는 이재훈 씨가 이사한 집에서 발견해 보관하다 올해 1월 국가유산청에 기증했으며, 녹음한 사람은 1971년 발굴 당시 MBC 지방주재통신원 서두선 씨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