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  스님

 

 

앞에서 달마 조사가 혜가 스님에게 불편한 너의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하게 해주리라 하였지만 잘난 체하고 뽐내는 망상의 허깨비 마음을 어찌 찾을 수 있고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혜가 스님은 이런 불편한 분별 망상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찾아지면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겠느냐? 벌써 너의 마음을 편안히 하였다.”

마음이 찾아진다면 그 마음은 번뇌 망상일 뿐 본래 참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의 티끌을 포함하여 우주세계 일체존재가 그대로 작용하는 생각이고 마음이며 부처인데 무엇을 찾을 수 있고 찾을 수 없으며, 무엇을 좋아해서 따로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나쁘다 하여 따로 버릴 수 있으며, 무엇이 크고 작고, 무엇이 예쁘고 밉고,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으며, 무슨 똑똑하고 잘나고 뽐내는 아만이 있고, 다른 사람은 나보다 못하다며 경시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어떤 괴로움의 고통과 즐겁고 편안함이 있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여당과 야당이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일체가 오직 작용하는 생각 마음 부처이므로 불편한 번뇌는 본래부터 없기 때문에 당연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였습니다.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히 해 주었다. 너는 보는가?”

혜가 스님이 이 말씀에 문득 활짝 깨닫고 조사에게 사뢰었습니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하고 고요하여 오늘에야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나이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지혜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이다.”

혜가 스님이 이 말씀에 참마음을 활짝 깨달았습니다. 참마음이란, 나는 똑똑하다고 뽐내고 너는 나보다 어리석다고 경시하는 마음이 없는 평등한 마음이 참마음입니다. 또한 참마음은 우주세계의 모든 존재가 그다운 역할과 생각 그 나름의 작용을 하는 것을 참마음의 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존재가 빠짐없이 바로 참마음의 부처이기 때문에 티끌 하나라도 따로 얻을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혜가 스님은 달마 조사에게 사뢰었습니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곧 일체존재가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공하고, 또한 잘났다고 뽐내지 않아서 고요해서 일체가 그대로 깨달음이므로 오늘에야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았나이다.”

모든 법이 본래 공하고 고요하다는 것은, 하나의 티끌을 포함한 이 몸뚱이와 우주세계의 일체존재가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므로 곧 공하고 분별의 대립이 없으므로 고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세계는 우주세계라는 이름이 바로 생각과 마음이고, 우주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와 우주를 나타내는 뜻과, 우주에 대한 느낌이 곧 생각 마음 부처이며, 우주세계의 구성원들의 그 나름의 역할과 모든 작용이 바로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세계는 곧 활동과 작용이고, 활동과 작용하는 것이 생각과 마음이며 이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이 곧 작용하는 생각 마음 부처이며, 나의 재산과 부인을 남에게 줄 때 서운하고 아까워하는 것도 눈과 팔 다리를 잘라 줄 때 느끼는 지옥 같은 고통 또한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므로 조금도 아깝지도 서운하지도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주세계 자체 그대로가 깨달은 생각 마음 부처이므로 혜가 스님은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지혜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 지혜의 바다와 열반의 언덕 자체가 바로 생각 마음 부처이므로 생각과 마음을 움직일 필요도 없고, 발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지혜의 바다에 이르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사가 말하였습니다.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살구 열매 하나도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고, 끝없이 멀리 있는 우주세계 끝자락도 작용과 생각과 마음과 부처로서 티끌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살구 열매 하나 보듯이 우주세계 끝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내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와 우주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는 천이통(天耳通)도 마음과 부처이므로 이와 같고, 한걸음에 우주 끝까지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과 지금 나의 마음을 알듯이 우주세계 전체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 타심통(他心通)과 모든 사람의 전생을 아는 숙명통(宿命通)과 모든 번뇌 망상을 끊어서 다시는 미혹의 중생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누진통(漏盡通)이 작용하는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므로 이 같은 신통을 행하기가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이는 것처럼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생각과 마음과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본래부터 부처이므로 영원히 죽지도 않는 무궁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망상으로 이루어진 재산과 부인 그리고 눈과 팔다리 몸뚱이 전부를 남에게 주어도 조금도 아깝거나 서운하지 않습니다.

당시 선사가 머물고 있던 위나라는 불법을 널리 받들어 많은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지도자급이 되는 몇몇 스님들이 달마 조사를 질투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사가 현묘한 덕화의 바람을 떨치고 법의 단비를 뿌리는데 자신들의 옹색하고 어리석은 마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먼저 나서서 조사를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어 자주 음식에 독약을 넣었습니다. 하루는 조사가 독약을 먹고 대변을 보니 독약이 너무도 독해서 바위가 쪼개지기도 했습니다. 독약을 넣는 횟수가 여섯 차례에 이르렀을 때 교화할 인연도 다하였고 법 전할 사람도 만났으므로 다시는 독약에서 구제하지 않고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에 위나라 효명제가 웅이산에 장례지내고 정림사에 탑을 세웠습니다.

그 뒤로 3년 만에 위나라 송운이라는 이가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총령에서 달마 조사를 만났는데 손에 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가시므로 물었습니다. “스님 어디를 가십니까?” 조사가 말하기를 “나는 서역으로 돌아가오. 그리고 그대의 군주가 이미 세상을 뜨셨소.” 하였습니다.

송운이 이 말을 듣고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조사를 작별하고 위나라에 도착하니 과연 명제는 이미 승하하였고 효장제가 즉위하였습니다. 송운이 지금까지의 사실을 보고하니 황제가 무덤을 열어보게 하니 빈 관 속에 신 한 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온 조정이 깜작 놀랐고 황제의 명에 따라 남은 신을 갖다가 소림사에 공양하였습니다.

본래부터 달마 조사는 독약에 의해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독약이 곧 독약이 아니고 작용하는 마음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 미혹한 중생들은 독약은 위험하고 먹으면 죽는다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독약이라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번뇌 망상이 저것은 독약이라고 조작한 허깨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목숨을 앗아간 십자가가 바로 작용하는 마음이었기에 예수는 목숨을 잃지 않았고, 베드로도 성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갈증에 목숨을 다한 스님도 도리천에 즉시 태어났으므로 목숨을 잃지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달마 조사와 예수와 같이 목숨을 잃지 않고 죽음을 면하여야 하는데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젊고 건강할 때에는 몸이 편안하며 힘이 넘치고 즐거운 마음이 항상 일어납니다. 그래서 목숨을 유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몸이 늙고 병들면 힘이 들고 불편하며 아프고 괴로운 고통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결국 아프고 괴로운 고통이 계속 누적되고 쌓이면 목숨이 지속되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오직 아프고 괴로운 고통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방도는 괴로운 고통이 일어났을 때 즉시 그 괴로운 고통이 바로 고통이 아니라 작용하는 마음이고 부처라고 바르게 보아서 그 고통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 끊임없이 괴로운 고통이 일어나면 계속 끊임없이 그 고통이 마음과 부처라고 알고 믿어서 어떤 괴로움의 고통도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깨달아서 티끌만한 괴로운 고통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태어나고 죽는 고해(苦海)의 사바세계를 영원히 벗어나는 참된 길이며, 이것이 바로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온 진실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2천여 년 전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와서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이 곧 견성성불(見性成佛) 부처라는 진리를 알려주고자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아는 것만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조사와 같이 생사(生死)를 면할 수 없습니다. 부처는 깨달음이므로 마음을 깨쳐야 부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체를 오로지 마음과 부처로 보면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