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수천 명의 시위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다.", "한국의 독립선언서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한다."

한국의 3.1만세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즈 기사. 근대문화유산 '딜쿠샤' 2층에 전시되었다. 오른편 기사 하단 붉은 칸에는 출처가 3월 12일 서울로 적혀있어 AP통신에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한국의 3.1만세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즈 기사. 근대문화유산 '딜쿠샤' 2층에 전시되었다. 오른편 기사 하단 붉은 칸에는 출처가 3월 12일 서울로 적혀있어 AP통신에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1919년 3월 13일 자(현지) 뉴욕타임즈의 제목과 부제목, 그리고 중간 내용이다. 미국 대중에게는 낯선 동북아 한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이 13일 만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신문에 자세히 실렸다.

이날 기사에는 “3월 1일을 독립선포일로 삼아 국내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가두 행진과 시위를 벌였다. 일본 당국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곧 평정을 회복하고 재빨리 거센 반격에 나서 수천 명의 시위대를 체포하였지만, 일본 언론은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하였다”라는 구체적인 내용이 서술되었다.

생생한 현장감과 동시에 일본이 3.1만세운동을 대외적으로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담겨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당시 식민지 한국에 기자를 파견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7개월 만인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 체결까지 준비과정 중이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초대 광무황제(고종)가 갑작스럽게 식혜를 마시고 심한 경련 후 승하하면서 국제사회가 초미의 관심을 두었다.

세브란스의전에 입원한 메리 테일러는 남대문 거리가 잘 보이는 방에서 고종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한국사람들을 목격했다. 사진 딜쿠샤 상영관 영상 촬영.
세브란스의전에 입원한 메리 테일러는 남대문 거리가 잘 보이는 방에서 고종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한국사람들을 목격했다. 사진 딜쿠샤 상영관 영상 촬영.

하지만 일제가 통상 150일간 진행하던 조선의 국장 절차를 무시하고, 40여 일만인 3월 3일에 장례식을 신속히 치르도록 했기 때문에 언론사에서 기자를 파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때, 한 장의 기사와 기미독립선언서를 보냄으로써 일본이 국제사회, 특히 언론을 향해 ‘조선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화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라고 한 선전이 기만이란 걸 알게 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국권 침탈 사실, 한국인의 굳건한 독립 의지를 전 세계를 향해 타전한 인물이 바로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이다.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테일러와 아내 메리 테일러. 사진 강나리 기자.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테일러와 아내 메리 테일러. 사진 강나리 기자.

당시 국내에서 사업하던 그는 AP통신의 임시통신원 역할을 맡아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왜곡될 뻔한 3.1만세 운동의 진실을 뉴욕타임즈를 비롯해 미국과 서구 유럽의 유력 언론들에 알렸는데 그 과정에는 그의 아들 ‘부르스 T. 테일러의 탄생’이라는 기막힌 우연이 있었다.

아내 메리 L. 테일러는 3.1만세운동 하루 전인 2월 28일 세브란스의전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메리는 병실 창문 밖으로 일제와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28일 출산한 아내에게 달려간 앨버트가 갓 태어난 아들을 안아 들던 순간 우연히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기미독립선언서였다.

3.1만세운동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 태어난 아들 부루스 테일러와 아내 메리 테일러. 딜쿠샤 전시물. 사진 강나리 기자.
3.1만세운동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 태어난 아들 부루스 테일러와 아내 메리 테일러. 딜쿠샤 전시물. 사진 강나리 기자.

한국어에 능통했던 앨버트는 단번에 알아봤고 흥분한 그는 작성한 기사 한 부와 기미독립선언서 한 부를 동생 윌리엄에게 맡겼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동생은 그걸 접어 구두 뒤축에 숨겨 배를 타고 도쿄로 가서 AP통신 도쿄지사를 통해 미국에 타전했다.

그렇다면 기미독립선언서는 왜 신생아의 침대에 있었을까? 이유는 나중에 세브란스의전 학생이던 이용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고종 독살설이 퍼지며 사회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고 일제는 국장일인 3월 3일 큰 시위가 있을 것이라 예견하고 촘촘한 감시망을 펼쳤다.

이때, 학생들은 세브란스의전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는데 이를 눈치챈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다. 급히 외국인 간호사에게 부탁하니 간호사는 외국인 병동에 숨겼고 마침 그것을 앨버트 테일러가 발견한 것이다. 

1897년에 아버지를 따라 식민지 조선에 와서 터를 잡고 사업을 하던 미국인 앨버트가 어떻게 일제의 선전 대신 조선인의 심정에 귀 기울이게 되었을까?

딜쿠샤의 겨울. 1920~30년대 서양식 2층 건물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이다. 사진 심남희 문화해설사 제공.
딜쿠샤의 겨울. 1920~30년대 서양식 2층 건물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이다. 사진 심남희 문화해설사 제공.

이는 현재 사직단에서 이화여대로 넘어가는 방면의 사직터널 왼편, 종로구 행촌동 본래 위치에 복원된 근대문화유산이자 테일러 부부의 보금자리 ‘딜쿠샤(페르시아어-기쁜 마음의 궁전)’에서 찾을 수 있다.

2층 전시실, 아내 메리가 그린 초상화 속 ‘김 주사’는 본명이 김상언이다. 테일러 가족의 집안일과 테일러 상회의 일을 도와주던 인물이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그의 직함 ‘주사’는 관직명이며, 그는 1906~1910년 의정부 주사, 내각 서기랑, 내각 주사 등 공직에서 일했다.

메리 테일러가 그린 '김주사'의 초상화. 미국에서 교육받은 그가 앨버트 테일러 상회일을 도우며 그에게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진 강나리 기자.
메리 테일러가 그린 '김주사'의 초상화. 미국에서 교육받은 그가 앨버트 테일러 상회일을 도우며 그에게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사진 강나리 기자.

김 주사는 테일러 부부가 당시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테일러 부부가 미국으로 추방당한 후 일제로부터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앨버트 테일러 "태평양 너머에 나의 나라가 있고 나의 집이 있다"

앨버트 테일러는 3.1만세 운동 이후에도 만세 운동의 보복으로 일제가 일으킨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 그는 서울 주재 미국 영사 커티스, 다른 외국 언론인들과 합세해 만행을 중단하도록 조선총독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데 관여했다.

또, 체포된 독립운동가의 재판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외국인 기자가 재판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일제에는 부담을 주었다.

앨버트의 기사는 일본의 반인륜적인 탄압 행위를 알리고, 한국에 우호적인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AP통신원으로 활동한 내용은 그가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남아있다.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묘원에 안장된 앨버트 테일러 묘비(왼쪽). 오른쪽은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의 묘비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묘원에 안장된 앨버트 테일러 묘비(왼쪽). 오른쪽은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의 묘비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현재 그는 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와 함께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미국으로 추방당한 후 앨버트는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던 중 소원을 이루기 두 달 전인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딜쿠샤의 추억'이라는 책자에는 그의 유해를 안고 한국에 온 아내 메리 여사가 "앨버트는 태평양 너머에 자기 나라가 있고 자기 집이 있다고 늘 이야기 했다"고 전한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