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ilderness 2, 2024, Oil on canvas, 84.5 x 155.5cm. 이미지 갤러리JJ
A Wilderness 2, 2024, Oil on canvas, 84.5 x 155.5cm. 이미지 갤러리JJ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유현경(Hyeonkyeong You) 은 ‘그리기’, 곧 회화적 속성에 충실한 작가로, 주로 사람과 집, 풍경 등을 매개로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추상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그림으로 풀어낸다.

작가는 표정 없는 초기 인물화를 비롯한 거침없이 빠른 붓놀림과 최소한의 형태를 가진 인물화로 그 독창성이 가장 먼저 알려졌고, 그것은 작업에서 꾸준히 많은 비중을 차지해왔다. 인물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작업은 집과 자신이 지나다니는 길 같은 장소의 정취에 관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20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 후 최근까지 여주미술관(2024년) 전시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추상회화와 텍스트를 사용한 회화를 선보이는 등 활발한 전시 행보와 진전된 작업을 보이고 있다.

A Wilderness 3, 2024, Oil on canvas, 87 x 154cm. 이미지 갤러리JJ
A Wilderness 3, 2024, Oil on canvas, 87 x 154cm. 이미지 갤러리JJ

 

갤러리JJ에서 2월 28일 개막하는 전시 《유현경: 나는 피안으로 간다》(You Hyeonkyeong: I retreat to the realm in a timeless horizon)에서는 유현경 작가의 작업을 볼 수 있다. 그간 그의 작업을 종종 대변해 왔던 인물 작업보다 장소에 대한 정취나 기억과 함께 태곳적 시간을 품은 대자연의 풍광을 통해 더욱 확장된 세계를 보여준다. 전시는 여행에서 마주한 광활한 자연환경을 체험하고 그린 <Wilderness> 시리즈를 중심으로 베를린을 비롯하여 동서양의 도시와 자연, 문화유적에서의 느낌을 반영한 작품, 자화상 등 15점의 유화 작품으로 구성된다.

유현경의 예술세계는 세계와 나를 관계 맺는 또 하나의 태도를 제시한다. 작업은 작가 자신으로 환원된다. 대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다루는 작가는 보이는 대상을 이미지로 차용하기보다 실질적으로 대상에 다가가고 접촉하여 내밀한 변화를 포착한다. 그것은 형태를 구축하기보다 해체하며, 단순한 시선을 넘어서 구체성을 생략해 버린 채 표현적이면서 추상적인 화면으로 나타난다. 작업은 솔직하고 거침없으며 견고한 구성력을 보인다.

다시 만나는 길 4Destination to Meet Again 4, 2024, Oil on canvas, 124 x 105cm. 이미지 갤러리JJ
다시 만나는 길 4Destination to Meet Again 4, 2024, Oil on canvas, 124 x 105cm. 이미지 갤러리JJ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베를린에서의 자유로운 느낌을 자신이 지향하는 삶에의 의지로 좀더 심화하여 드러내며, 이는 곧 자신이 체험한 척박한 땅, 인적 드문 황무지로 투사된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Wilderness> 시리즈는 단순한 풍광이기보다 시간으로 달리는 광야와 대지, 시간과 결합한 풍경이다. 문명이 닿지 않은 원초적 풍광은 시간을 느끼게 한다. 문자 그대로 ‘저쪽 언덕’이란 뜻의 피안은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가 마음 한편에 품고 있는 언젠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장소일지 모른다. 작가에게 그것은 자신이 처한 현실의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깊이를 가지는 시간과 공간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것은 혹여 작가로서의 창조적 정신의 자유와 고단한 현실 삶 사이의 모순과 갈등일까?

<다시 만나는 길> 시리즈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여러 번 그린 시안의 대안탑, 한가한 회색빛의 성벽길로 이어진 공간을 걸으며 옛것과 현재가 함께 어우러짐이 좋았던 시안의 어느 공간에서의 정취와 기억을 떠올린 이미지다. 작품<샹그릴라로>는 자신이 방문했던 중국 윈난성의 샹그릴라 지역명을 그대로 붙였다. 샹그릴라는 ‘유토피아’적인 의미망을 가진다.

모두의 얼굴, The Face of All, 2023, Oil on canvas, 126 x 122cm. 이미지 갤러리JJ
모두의 얼굴, The Face of All, 2023, Oil on canvas, 126 x 122cm. 이미지 갤러리JJ

 

작가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 머물기를 좋아한다. 충주와 고양, 속초를 비롯하여 취리히, 뉴욕, 아르헨티나, 독일 등 여러 지역의 레지던시 및 작업실을 이동하고 크로아티아, 시칠리아, 중국 등 수많은 장소를 체험해 왔다. 이처럼 체험했던 장소와 풍경의 구체적인 정보보다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을 포착하여 작업한다.

강주연 갤러리JJ 디렉터는 유현경 작가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회화의 본질이란 불빛에 생긴 연인의 그림자를 벽에 그려놓듯이(대플리니우스),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데리다는 재현은 시각이 아닌 기억에 의존하며 존재가 아닌 부재를 조건으로 한다고 했다. 기억은 곧 시간성의 맥락에 있고 이는 유현경의 작업에서 잘 읽혀진다. 유현경은 ‘눈을 떠 바라보는 풍광도 좋지만, 눈을 감아 그려지는 풍광도 그에 못지않을 수 있다’는 생각한다. 그에게 인물이나 풍광과 같은 대상은 회화적 사건의 시초로써 작용한다. 인물을 둘러싼 추상적인 분위기를 그린 것처럼 풍경 그림 역시 구체적인 장소나 풍경 예찬이 아니라 그것은 온몸으로 직접 느낀, 시간 속에서 떠오르는 마음 속의 풍광이다. 작가는 ‘천천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 생각하지 못한 내밀한 감정들이 그림으로’ 나오기를 기다린다. 따라서 그것은 장소의 표면 아래 스며 있는 역사와 같은 시간성의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은 감각적 확장이며, 곧 그림은 자신의 무의식이자 반영이다. 마치 자화상을 보듯 자신과 대면하고 응시하며, 대상에의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빠져나오게 한다. 그는 붓질하는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빠른 붓질은 오히려 대상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보다 이처럼 오랜 내면의 관찰과 응시를 거쳐 나온 것으로, 무의식과 의식이 교차하는 숙련된 조형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형상을 빌어서 대부분은 붓질과 색이 응축된 감정선을 따라 머리로 인식하기 전에 더 빨리 손이 움직인다.”

강주연 디렉터에 따르면 “유현경의 작업에는 여백이 많다. 그림은 이미 작가 자신의 신체, 삶 전반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 것, 그래서 자신 안에 잠재된 수많은 것을,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채우기보다 비워내는 것에 가깝다. 그는 그리기보다 지우기, 남겨두기에 주력하는 듯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언어적 질서와 제도로부터 공백과 결여를 탐닉한다.”

“아무 기대도 없는 곳 ··· 기대에 부응해서 살아가는 삶 말고 좀 더 자유로운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며 지냈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제도를 충족하지 않는 생각들을 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광야, 척박한 땅들, 풍광, 자연 그런 요소로 등장하게 된 것 같다.” (유현경, ‘작가노트’ 2025)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작가의 삶과 예술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제 그의 초점은 삶과 예술, 시간의 깊이와 세계의 근원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확장하고 있다. 작가는 어느덧 다시 현재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꾼다. 그가 누리고 싶은 자유와 깊이를 가진 시간은 철학자의 ‘들길’을 걷듯, 길고 느린 것의 시간,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간일까? 그 옛날 ‘스콜레’의 삶, 곧 강제나 필요, 수고나 근심이 없는 자유의 상태일까? 생각해 보면, 피안에의 꿈은 이미 그의 삶 속에서, 베를린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모든 삶이 그러하듯 다가서면 저만큼 물러서기를 거듭하여 희망으로, 욕망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의 ‘창조’적 삶과 예술을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요인임은 분명해 보인다. 전시는 ‘시간을 담은 풍경’을 통해 초상화 이후 베를린으로의 이주를 전후하여 현재까지 유현경 작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또 다른 장을 열어 보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강주연 디렉터의 말이다.

전시 《유현경: 나는 피안으로 간다》는 갤러리JJ(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30길 63)에서 4월 1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