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남도 안악3호분 행렬도에 ‘성상번(聖上幡)’이라 글자를 쓴 깃발. 북한학자들은 이 깃발을 통해 해당고분이 왕릉임을 확인했고, 묘주에 대해 미천왕설이 제기되었다가 이후 고국원왕설이 유력해졌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황해남도 안악3호분 행렬도에 ‘성상번(聖上幡)’이라 글자를 쓴 깃발. 북한학자들은 이 깃발을 통해 해당고분이 왕릉임을 확인했고, 묘주에 대해 미천왕설이 제기되었다가 이후 고국원왕설이 유력해졌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일본어에서 토끼를 일컫는 ‘우사기’는 고구려 이두인 ‘烏斯含(오사함의 옛 발음)’의 흔적이며, 청국장을 뜻하는 ‘미소’ 역시 고구려어 ‘미순’의 흔적이라고 한다. 현재 전하지 않는 고구려인의 언어는 과연 어떠했을까?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은 ‘문자’라는 키워드를 통해 고구려사 이해의 폭을 넓히고, 고구려 시대 문자 관련 사료를 집대성해 역사‧문화적 의의를 밝히는 신간 〈고구려의 문자문화〉를 발간했다.

만주 벌판의 광활한 영역을 지배했던 고대 동아시아 강국 고구려. 하지만 부족한 사료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향수와 아쉬움을 주는 시공간이자 당대의 역사상을 온전히 그려내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우리 고대사 연구에서 정작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다” 소통의 도구 문자문화로 본 고구려사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7월 4일 고구려의 문자 관련 사료와 유물 등을 집대성한 연구서 '고구려의 문자문화'를 발간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7월 4일 고구려의 문자 관련 사료와 유물 등을 집대성한 연구서 '고구려의 문자문화'를 발간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저자 고광의 재단 연구위원은 “그동안 고구려사를 비롯한 우리 고대사를 다루면서 정치사, 제도사, 사회사 분야에서 다루었는데 정작 그 알맹이가 빠져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체계화하며 개척하고 전쟁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 소통하는데 문자가 사용되었다. 문자의 중요성은 이야기하면서도 그간 문자문화를 중심으로 출간된 연구서가 없었다”라고 이번 출간 취지를 밝혔다.

그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사기》, 《한서》,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등 국내외 사료 속 고구려 문자문화 관련 내용을 추출 분석해 고구려 초기 문자문화의 형성 과정과 전개 양상을 밝혔다. 아울러 고고학 발굴과 조사로 축적된 문자 자료, 고분벽화 분석 등 기록과 유물을 상호 비교해 고구려의 문자문화를 구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역사학과 고고학뿐 아니라 문자학, 서예학, 미술사학, 미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융합과 통섭적 연구 방법을 모색했다.

특히, 고분벽화에 묘사된 글씨 쓰는 장면을 치밀하게 분석해 고구려인들이 일상에서 했던 문자 생활, 즉 붓을 쥐는 방법(집필법)부터 서사 자세, 붓의 형태, 서사 관리들의 업무와 관련된 독특한 습관까지 생생하게 그려냈다.

(왼쪽) 집안 무용총 현실 천장벽화의 서사인(글 쓰는 사람). (오른쪽) 평안남도 덕흥리벽화분 막부관리도 서사인.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왼쪽) 집안 무용총 현실 천장벽화의 서사인(글 쓰는 사람). (오른쪽) 평안남도 덕흥리벽화분 막부관리도 서사인.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연구서에서 “고구려 벽화에서 서사자의 팔을 보면 몸통 쪽으로 바짝 붙이고 있어 간독에 글씨를 쓰는 자세와 부합된다. 통구사신총과 무용총에 그려진 앉은 상태에서 서사하는 모습도 당시 간독 서사에 효과적인 자세였을 것”이라고 했다.

황해남도 안악3호분 묘주정사도 중 오른쪽에서 목간에 기록하는 성사(빨간 원).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황해남도 안악3호분 묘주정사도 중 오른쪽에서 목간에 기록하는 성사(파란 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안악3호분 묘주정사도 중 왼쪽 기실(빨간 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안악3호분 묘주정사도 중 왼쪽 기실(빨간 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간독은 종이를 사용하기 이전 좁은 폭의 나무인 목간, 넓은 나무판인 목독에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안악 3호분의 성사가 묘의 주인에게 보고하는 문서에 목간을 묶어 연결한 흔적이 보이고, 덕흥리벽화분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마상궁술 대회인 마사희馬射戲 에서 넓은 목독 양쪽에 선수별 경기상황을 기록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평안남도 덕흥리벽화분 사희주기인(마사희 경기상황을 기록하는 사람).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평안남도 덕흥리벽화분 사희주기인(마사희 경기상황을 기록하는 사람).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또한, 통구사신총의 현실 서쪽 천장고임 벽화에는 머리를 풀어 헤친 사람이 오른손에 붓을 들고 간독에 글씨를 쓰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고구려 유물 중 실물 붓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안악3호분, 무용총, 덕흥리벽화분 등 벽화에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기본구조가 붓대와 필모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집안 통구사신총의 서사인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간독에 글을 쓰는 모습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집안 통구사신총의 서사인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간독에 글을 쓰는 모습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한편, 고구려 건국 초기 문자문화에 관해 고광의 연구위원은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 같은 시가의 창작은 한자의 단순 이해를 넘어 문학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그 수준을 가늠케 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건국 초 문자를 기록하는 일은 주로 누가 담당했을까?

“유리명왕 29년 여름 6월에 모천가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서로 무리를 이루어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의논하던 사람(議者)이 말하기를, ‘검은색은 북방의 색이니, 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中)

초기 관련 기록에는 巫(무), 議者(의자), 占者(점자), 師巫(사무), 日者(일자), 巫卜(무복), 巫者(무자) 등이 왕의 지근거리에서 꿈이나 자연현상의 이변과 신이(神異, 신기하고 이상함)를 해석하고 길흉을 예측하는 등 국정의 자문역을 담당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사관의 역할과 문자의 해독과 기록 및 전승 등의 업무를 담당해 고구려의 문자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식자층이 체제 정비를 거치면서 국정 운영의 전문가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 主簿(주부)는 외교문서 작성과 해독을 주요 업무로 하는 문서 행정을 관장하는 최고위 직책이었다. 이는 차대왕을 이어 신대왕의 왕위 계승에 깊이 관여한 좌보 어지류와 봉상왕 폐위와 미천왕 추대를 추진한 국상 창조리가 모두 大主簿(대주부)로서 신임 국왕에게 국새를 바치는 등 권력 이양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문자문화는 자연스럽게 사회 저변에 확산되었는데 인재 등용에서도 나타난다.

전국에서 천거 등의 방식으로 글씨를 잘 쓰고 숫자에 밝은 인재를 등용했는데 명재상 을파소(? ~203)의 발탁사례를 보면 ‘性質剛毅 智慮淵深 (성질강의 지려연심)’이라 하여 품성과 함께 심오한 지식이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인재의 자질 습득은 유가 경전을 비롯해 다양한 사상서들이 유통되어 문자문화가 확산되고, 천거와 같은 관리 선발 제도로 인한 동기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