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도협약으로 일본이 청에 넘긴 간도는 동간도 동부지역일 뿐
- 중국, 고구려‧발해뿐 아니라 간도지역 조선족의 역사적 공간도 지우려

1944년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제작된 '항법용경위도도' 중 국경지방 지세 및 범위.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보고서' 갈무리.
1944년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제작된 '항법용경위도도' 중 국경지방 지세 및 범위.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보고서' 갈무리.

20세기 초 간도는 제국주의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 성향의 청나라가 영토확장과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땅이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의 교섭을 통해 남만주철도부설권과 무순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귀결시켰다.

하지만 그 땅에 한민족 조선인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간도는 조상의 땅이고 삶의 터전이었다. 간도는 여전히 한중 간의 풀지 못한 영토 분쟁지이다.

올해 6월 발간한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1910년대 간도에 살던 한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간도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도서출판 역사路)
올해 6월 발간한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1910년대 간도에 살던 한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간도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도서출판 역사路)

일제가 1914년 조선총독부의 주관으로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간도를 현지 조사하고 1915년 작성한 보고서 ‘국경지방시찰복명서’를 해석한 연구서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보고서〉가 발간되었다.

해당 복명서는 조선총독부가 간도 월경 조선인이 30만 명을 넘어서 중국 측과 분쟁이 종종 발생하자 국경지방 현지 시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문상명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본인 제공.
문상명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 본인 제공.

저자 문상명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용인대학교 초빙교수)은 당시 한인韓人들의 간도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조선 숙종 38년(1712) 청과의 국경을 획정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현지 주민이 100명 넘게 동원되었다”라며 “정계비에 명시한 ‘토문강’에 대해 훗날 조선과 청의 해석이 달라졌지만, 함경도 일원에 살던 주민에게는 비를 세울 당시 자신의 조부, 증조부가 따라가 직접 밟아 확인한 땅”이라고 했다.

흔히, 우리 민족은 간도를 북간도라 불렀다. 본래 두만강 사이 감자를 심던 모래톱을 일컬어 사이 간(間)을 써 ‘간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강 가운데 있는 밤섬과 같은 개념이다. 이후 강 건너 북쪽으로 이주하며 북간도라는 말이 생겨났다.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지가 간도인지 아무도 규정한 적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이 살던 공간은 어디든 간도였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북쪽 토문강이 중국과의 경계라는 인식,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 우리 땅이라는 확신으로 두만강 건너 진출

문 연구위원은 연구서 책머리에서 “간도라는 공간은 국경이 불분명했고, 국가의 역할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한인들에게 백두산은 매우 중요한 산이었다. 우리의 산이며 민족의 상징이고,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북쪽의 토문강(조선의 해석 ‘오도백하’)이 중국과의 경계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강을 건넜던 것”이라고 밝혔다.

간도 지역 한인들의 교육 현황을 보여 줄 수 있는 간도 서부 낭낭고 지역의 한인 서숙. 간도임시파견대기념사진첩 자료이다.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갈무리.
간도 지역 한인들의 교육 현황을 보여 줄 수 있는 간도 서부 낭낭고 지역의 한인 서숙. 간도임시파견대기념사진첩 자료이다.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갈무리.

그는 이번 연구를 통해 밝힌 중요 사실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조선총독부의 보고서는 한‧일 병탄 이전인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여러 차례 간도지역을 조사한 보고서들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병탄 이전에 우리나라에 대한 통치를 간도까지 확장하고 나아가 청과 러시아를 견제하여 만주 일대를 차지하고자 1907년 8월 23일 용정총에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 지역을 수 차례 조사했다.

둘째, 해당 복명서가 조선총독부가 정부에 보고한 첫 보고서라는 점, 그리고 셋째, 그간 연구자들도 간도의 범주에 대해서 정확하게 연구가 되지 않은 상태인데 이 보고서를 통해 간도의 정확한 범주를 밝힐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불분명했던 간도의 범주 확인, 간도협약 상 간도로 규정한 공간이 동간도 동부임 확인

문상명 연구위원은 이번 연구서에 1937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간도문제의 경과와 이주조선인’이라는 책에 첨부된 지도〈간혼지방약도間琿地方略圖〉를 실어 간도의 범주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발행 '간도문제의 경과와 이주조선인' 책자 내 〈간혼지방약도間琿地方略圖. 사진 문상명 연구위원 제공.
1937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발행 '간도문제의 경과와 이주조선인' 책자 내 〈간혼지방약도間琿地方略圖. 사진 문상명 연구위원 제공.

그는 “지도에 간도와 혼춘지역 경계, 총영사관, 경찰 분소 등이 표시되어 있는데 특히, 1909년 간도협약 당시 간도 지역(동간도 동부)과 동간도 서부 지역의 범주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간도협약에서 백두산 동쪽으로 흐르는 석을수(石乙水)를 중국과 조선의 경계로 정한 것도 자세히 나타나 있다”라고 밝혔다.

즉, 간도협약에서 간도로 규정한 공간은 ‘동간도 동부’지역이며, ‘동간도 서부’는 오도백하(조선에서 주장하는 백두산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에서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 보고서는 정치, 행정, 인구변천, 사회문화, 산업경제 등 지역조사의 전형적인 보고서인 만큼 1910년대 전반기 간도에 살던 조선인의 생활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당시 간도 지역에 살던 한인들의 인구변천과 이동, 토지 소유 현황, 경제활동을 비롯해 풍습, 교육, 종교 등 생활실태,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간도지역 한인들의 가난한 삶, 혼인 관련 중국인 지주의 횡포 등 담겨 있어

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1913년 간도총영사관이 추산한 토지 소유관계를 보면, 간도 한인 농민 호수는 약 2만8천 호에 2만 정보(3천 평), 중국인은 약 6천 호에 총 소유지는 약 4만5천 정보였다고 한다. 당시 이주자들은 자금이 없는 데다 한인들은 토지소유권도 완전히 인정받기 어려워 소작인으로 지내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회령 두만강변 신부차림의 여인. 1910년대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갈무리.
회령 두만강변 신부차림의 여인. 1910년대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갈무리.
간도 걸만동 부근 혼례. 1910년대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갈무리.
간도 걸만동 부근 혼례. 1910년대 촬영한 유리 원판 사진. 사진 '조선총독부의 간도시찰 보고서' 갈무리.

풍습 중 혼인과 관련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혼인은 조선 내에 비하면 대체로 늦었는데 중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전연 없다”라고 했고, 중국인 지주의 횡포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한인들은 산간벽지라도 지아비와 아내가 같이 했는데 중국인은 거의 홀로 이동해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수년이 되는 자가 적지 않다. 노동자도, 지주도 그러하며 순찰 관리 역시 그렇다. 여기에서 지주는 한인에게 은혜를 베푼다며 종자, 농구, 식료를 대여해주고 이를 갚지 못하면 처녀를 대물변제로 공출케 한다. 이와 같은 악풍은 장백부 지역에 특히 심하다.”

교육과 관련해 “근래 신교육을 받은 청년이 이주해 오는 자가 증가하여 저들은 모국의 멸망은 교육이 발달하지 않은 것이라고 외쳐 번번이 교육학교 설치의 필요성을 부르짖고 있으나, 저들 중에는 무뢰한 이들(독립운동가)도 혼재하여”라는 기록도 있다.

문상명 연구위원은 “독도는 우리가 점유하고 있지만, 간도는 현재 중국이 점유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되찾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하지만 간도에 대해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것은 그곳이 우리의 역사적 공간이었다는 사실이다”라며 “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이 동북공정 이후 우리의 역사적 공간을 지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동북공정이었고 그다음 장백산 공정이고 이제 조선족 문화를 없애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선족 문화가 그들의 소수민족 문화라고 했다가 아예 한족漢族의 것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간도 지역에 있던 조선족 공간도 지금 지우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우리가 간도라는 공간에 대해 계속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고 피력했다.

100여 년 전에 작성된 해당 복명서는 1907년 이후의 간도 상황을 포함한 종합보고서인 만큼 1910년대 간도의 한인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간도에 사는 한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간도 인식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상명 연구위원은 향후  1915년 조선총독부의 국경지방시찰복명서의 기반이 되었던 1907~1909년 조사보고서에 대한 번역사업과 자료수집을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