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 광개토태왕비(정식 명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 광개토태왕비(정식 명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고구려인의 문자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대표적인 비석은 광개토태왕비(정식 명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일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고광의 연구위원은 이번 7월 발간한 연구서 〈고구려의 문자문화〉에서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전에는 묘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5세기 확대된 국력과 외교력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입비(立碑, 비석을 세움)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독립적인 서체 양식인 ‘광개토태왕비체’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연구서 〈고구려의 문자문화〉의 저자 고광의 연구위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서 〈고구려의 문자문화〉의 저자 고광의 연구위원.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가 비석에 글을 새겨 통치에 활용한 것은 초기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때부터였다.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이 즉위 46년(98)에 길림성 훈춘지역으로 비정되는 책성을 둘러보고 그곳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하사품을 내려 위무하고 순수(巡狩, 왕이 나라 안을 보살피며 둘러봄)한 공적을 암석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묘에 비석을 세운 것은 광개토태왕 때부터이다. 비문에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선조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를 세우고”라는 부분이 나온다.

동시대 중원 문화와 다른 고구려 비석의 4가지 특징 : 독자적인 입비 정책, 자연석에 가까운 석주비, 독특한 서체, 비의 성격

연구서는 광개토태왕비를 통해 고구려인의 자주적 성향과 독창성, 문화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중원의 금비령에 반하는 자주적인 정책 추진이다. 당시 중원 지역에는 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는 금비령이 강화되었다. 고 연구위원은 “중원에서는 한나라 때 묘비가 성행했는데 왕뿐만 아니라 귀족계층까지 확산되면서 국가재정과 인력 낭비가 극심해졌다. 위나라 조조가 이를 막고자 금비령을 내렸고 그 이후 중원과 조공‧책봉 관계에 있는 이웃 나라도 그 질서를 따랐다”고 시대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히려 고구려 장수왕은 금비령과 관계없이 광개토태왕비와 같은 거대한 비를 건립했다. 이는 고구려의 자주적 면모를 나타낸다.

두 번째는 광개토태왕비는 자연석에 가까운 석주비로 중원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구려의 독창적인 형태라는 점이다. 이 형태는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어 자연석주비가 고구려의 독립된 양식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중원 지역의 석비는 네모반듯하게 가공된 판상형, 윗부분이 삼각형인 규수형 등이었다.

충주 고구려비(왼쪽)과 최근 발굴된 집안 고구려비(오른쪽)도 자연석 형태를 최대한 활용한 자연석주비의 형태가 뚜렷하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충주 고구려비(왼쪽)과 최근 발굴된 집안 고구려비(오른쪽)도 자연석 형태를 최대한 활용한 자연석주비의 형태가 뚜렷하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고 연구위원은 “석주비는 고대 동북아시아나 초원 지역에서 유행한 입석의 계통을 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태왕비는 원래 있던 선돌을 재사용했을 개연성도 상정해볼 수 있다”고 했다.

고구려의 자연석주비 양식은 5세기 전후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예속된 신라에도 이식되어 문자를 비롯한 석비 문화도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6세기 전후 신라 석비가 대부분 자연석을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고구려 계통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북한산에 세워진 신라 진흥왕순수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서울 북한산에 세워진 신라 진흥왕순수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국내성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된 비좌.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국내성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된 비좌.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한편, 그동안 진흥왕 이후 출현하는 개석(비석 윗부분 장식)과 비좌(비석을 땅에 고정하는 받침돌)를 갖춘 판상형 비석의 연원을 중국 측에서 찾았지만, 국내성 유적에서 발견된 비좌를 통해 고구려의 직접적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 광개토태왕비 비문의 서체는 중원의 비문 서체와 다른 독자성의 띤다. 비문의 필획의 굵기 변화가 거의 없이 고른 편으로 전서의 필획과 유사하나, 가로획의 방향이 수평을 유지하고 삐침과 파임에서 수필 부분이 약간 들리는 도법挑法이 나타나 전반적으로 예서에 가깝다.

광개토태왕비 제2면 탁본(혜정소장본 복원본A).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광개토태왕비 제2면 탁본(혜정소장본 복원본A).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고광의 연구위원은 “필획과 결구의 형태 측면에서는 예서隸書로 보는 것이 무난하지만, 내포된 예술성이나 독창성, 당시 고구려에서 이 비가 갖는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하나의 서체 양식으로 완성된 ‘광개토태왕비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비체는 5세기 전후 신라에 보낸 호우(청동솥)과 인장에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인장으로는 관인이 모두 3종 7건이 있고, 사인으로는 ‘계해년癸亥年’이라 새긴 인장 1건이 현재 집안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고 연구위원은 “당시 인장의 글자는 통상 전서체였는데 계해년 인장은 한시적인 용도임에도 중원의 인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고 서체는 당시 관행인 전서가 아닌 광개토태왕비와 같은 예서체를 채용했다. 세계 최초의 예서인장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광개토태왕비 탁본.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광개토태왕비 탁본.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마지막으로 광개토태왕비의 성격도 일반적인 묘비와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묘주의 이름, 관력(벼슬 이력), 행적, 향년, 사망연월일 등과 함께 애도하는 글로 구성되었다. 반면,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 개국 시조의 신성한 출생과 건국 유래, 이를 계승해 19대 광개토태왕까지 이어온 왕의 계보, 39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왕의 훈적과 정복 활동, 그리고 왕릉의 관리에 관한 연호와 관련 법령을 기록했다.

즉, 고구려 개국과 왕계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왕릉의 수묘제 관련 내용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동안 광개토태왕비에 대해 능비, 훈적비, 수묘연호비 등으로 학설이 나뉘었는데 세 가지의 복합적 의도가 모두 담긴 특수한 성격의 비석으로, 일종의 공덕비에 더욱 가깝다.

한편,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 멸망 후 한동안 잊혔다가 고려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여말선초에 다시 등장했다. 발견 당시 비록 금 황제의 비로 오인했지만, 조선 초 ‘용비어천가’에 그 존재가 나타난다.

그러다 고구려의 비석으로 알려진 것은 청나라 조정이 1877년 환인과 집안 지역에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해 관리를 강화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비의 재발견 초기에는 중국과 일본 학자의 연구가 주를 이루었고, 우리 연구는 일제강점기 신채호와 정인보에 이어 1960년대 이후 북한학계에서 본격화되었다.

고구려 백암성 고구려비 조각과 탁본.
고구려 백암성 고구려비 조각과 탁본.

7월에 발간된 ‘고구려의 문자문화’ 연구서는 광개토태왕비, 충주 고구려비, 집안 고구려비를 비롯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백암성 고구려비편과 국내성 인근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무문자비, 비좌 등을 소개하고 고구려비의 성격과 전개 양상을 조명했다.

집안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무분자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집안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무분자비.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문자문화' 갈무리.

또한, 현재까지 전하는 문자자료를 망라해 비명, 석각명, 금속기명, 불상명, 인장명, 와당명, 전명, 토기명 및 고분 묵서로 분류했다. 또한, 각각 최상의 도판을 제시해 명문을 재검토하고, 서체를 파악하여 그 변화 발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문자문화사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확인하고, 사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의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