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마당의 꽃담과 소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운현궁 마당의 꽃담과 소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서울에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했던 창덕궁에서 500여 미터 남짓 거리 운니동에 궁궐과 사대부가의 형태를 함께 품은 운현궁이 있다. 규모가 웅장한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5대 궁궐의 명성에 가려져 있으나 독특한 한옥 구조와 조선말 격변하던 역사를 품고 있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고종(대한제국 광무황제)이 태어난 곳은 아니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머물던 잠저(潛邸)이자 명성황후와 혼인을 한 곳이다. 또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세도정치를 꺾고 왕실의 권위를 세워 왕도정치로 개혁 의지를 펼치며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펼친 중심지이기도 했다.

본래 고종은 왕위계승과는 매우 멀었다.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로 21세에 요절한 효명세자(사후 문조 익황제로 추존)와 혼인한 신정왕후 조대비가 흥선대원군의 차남 명복을 양자로 들이면서 비로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1863년 12월 운니동 잠저를 헐고 새로 건립, 수리하면서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을 지키는 수직사. 궁에서 파견된 경비와 관리들이 머물던 곳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운현궁을 지키는 수직사. 궁에서 파견된 경비와 관리들이 머물던 곳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겨울을 맞아 하얀 눈으로 운치를 더하는 운현궁으로 가보자. 운현궁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긴 회랑과 같은 건물인 수직사(守直舍)가 있다. 과거 궁에서 파견되어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으로, 안에는 포졸의 복장과 곰방대, 화로, 호롱불 등 조촐한 생활용품을 볼 수 있다.

너른 마당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낸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운현궁의 자랑인 주황빛 꽃담이 펼쳐져 있다. 현재 복원된 운현궁 전각은 크게 노안당(老安堂)과 영화루(迎和樓) 이로당(二老堂), 노락당(老樂堂)이 있다.

하늘로 치솟은 처마선이 아름다운 운현궁의 노안당. 노안당은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공간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하늘로 치솟은 처마선이 아름다운 운현궁의 노안당. 노안당은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공간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하늘로 치솟아 오를 듯한 처마 선이 돋보이는 노안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오른쪽 끝에 지면보다 높게 띄워 마루를 깐 누마루 형태로 손님을 대접하던 영화루를 배치해 T자형의 구조이다. 3단의 계단 높이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전각을 올린 형태는 보통 사대부의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주로 궁궐에서 전각의 위엄과 품격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다. 영화루는 독특하게 현판이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노안당은 《논어》에서 나온 구절로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그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인데 특히 늙을 노(老)자가 독특하다. 현판 왼쪽에 노완(김정희 선생)이 석파 선생(흥선대원군)에게 드린다는 작은 글씨가 있다.

노안단의 현판. 나무 현판 위에 한지를 겹겹이 바르고 글자를 두드러지게 한 장지기법으로 되어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노안단의 현판. 나무 현판 위에 한지를 겹겹이 바르고 글자를 두드러지게 한 장지기법으로 되어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런데 전각을 짓기 10년 전에 추사 선생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집자(集字,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현판 위에 한지를 겹겹이 붙였고, 그 위에 글씨도 따로 한지를 더 겹쳐 붙여 도드라져 보인다.

노안당에서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평상. 사진 강나리 기자
노안당에서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평상. 사진 강나리 기자

온돌방으로 이루어진 노안당의 왼쪽 첫 칸에는 대원군이 사람을 만나고 집무를 보던 평상이 놓여있다. 노안당은 마루와 온돌방, 그리고 깊숙한 안쪽에 또 다른 방이 있는 삼중구조로 되어있는데 말년의 흥선대원군은 깊숙한 곳 작은 방에서 고종이 다시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12살 어린 나이로 왕위를 받은 고종을 대신해 실질적인 통치자로 이 노안당의 평상에 앉아 수많은 신료를 만나고 첨예한 정치적 결정을 했을 것이다. 실제 과거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고종과 대원군의 출입이 편리하도록 고종의 전용문인 경근문(敬覲門), 대원군의 전용문인 공근문(恭覲門)이 있었다.

말년의 흥선대원군은 노안당 깊숙한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아들 고종을 기다렸다고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말년의 흥선대원군은 노안당 깊숙한 안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아들 고종을 기다렸다고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막강한 권력의 중심지였던 노안당에 비운의 역사도 엿보인다. 복원 전 노안당의 대문은 마치 밖에서 가둔 듯 일반대문과 반대로 달려있어 전문가들이 놀랐다고 한다. 을미사변 후 대원군이 유폐된 흔적이 아닌가하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한 최익현의 상소로 실각하고 고종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는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당시 일본은 자국의 범죄를 숨기고 대원군을 배후로 지목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유폐되었고, 3년 뒤 1898년 대원군이 사망했을 때도 고종은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고, 다만 노제 이후 시신이 서문을 지날 때 통곡했다고 한다.

노안당 앞마당에 지붕을 향해 사선으로 기운 소나무. 사진 강나리 기자
노안당 앞마당에 지붕을 향해 사선으로 기운 소나무. 사진 강나리 기자

노안당이 사랑채로 대외적 공간이었다면, 중심에 있는 노락당은 안채로 대내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예서를 잘 썼던 추사의 제자 신관호가 쓴 노락당 현판이 걸린 본체의 양쪽에는 부엌이 있고 맞은편 건물에는 다듬이 돌, 바느질거리 등 살림살이가 놓여있다.

고종(광무황제)와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노락당 전경. 사진 강나리 기자
고종(광무황제)와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노락당 전경. 사진 강나리 기자

노락당은 고종(광무황제)과 명성황후가 1866년 가례를 올리고 주무신 공간이다. 혼례 당시 1,600여 명 정도가 운현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침소로 쓰였던 곳이라 더이상 신하인 대원군의 안채로 사용할 수 없었고 이후 철인왕후 등 왕실 중요한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되었다. 지금도 신랑 신부가 예약을 통해 150여 년 전 고종과 명성황후처럼 전통 혼례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혼례 이후 안채로 사용된 이로당 전경. 사진 강나리 기자
고종과 명성황후 혼례 이후 안채로 사용된 이로당 전경. 사진 강나리 기자

고종의 혼례 이후 운현궁의 실질적인 안채의 역할을 이로당(二老堂)이 맡았다. 건립 당시 정면 7칸 측면 7칸의 우물정자(井)형의 건물이었고, 지금은 서 측면에 덧달아 정면이 8칸으로 되어있다. 현판에서 이로(二老), 두 노인은 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말하는데, 현판의 이(二)자가 균형을 깨고 위쪽으로 올려있다. 대원군과 부대부인을 높이는 의미라 한다.

(위)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각으로 내부에서 사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래) 궁에서 나온 상궁들이 머물던 처소. 사진 강나리 기자
(위)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각으로 내부에서 사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래) 궁에서 나온 상궁들이 머물던 처소. 사진 강나리 기자

이로당 뒤편에는 고종이 어린 시절 자주 오른 노송을 기념한 경송비(敬松碑)가 있으나 노송은 사라지고 없다. 이로당과 노락당 사이에는 높이가 다른 복도로 이어진 복도각이 있어 오르내리며 내부에서 사방으로 다닐 수 있게 되어있다. 이 또한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이외에도 궁중에서 나온 상궁들이 머물던 공간도 있고, 손님을 접대하고 큰잔치를 하기 위해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인 빙고(氷庫)도 있다. 빙고 앞에는 난초를 유난히 사랑했던 흥선대원군이 난초를 올려두었던 무승대(茂承臺)도 있다.

노안당 지붕 너머로 보이는 서양식 3층 건물 양관. 지금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사용되고 있으며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하다. 사진 강나리 기자
노안당 지붕 너머로 보이는 서양식 3층 건물 양관. 지금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사용되고 있으며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하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한편, 이로당의 뒤편으로는 서양식 3층의 하얀색 건물, 양관(洋館)이 보인다. 일제가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회유하고자 지어주었다고 하고, 이준용의 사후에는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 왕자가 물려받기도 했다. 지난 2016년 방영된 tvN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 도깨비 김신(공유 분)의 저택으로 촬영되어 유명하다.

운현궁에서 눈여겨볼 곳 중 하나는 붉은 주홍빛 꽃담이다. 아름다운 색감의 꽃담에는 ‘영세춘 수복강녕 만세락(永世春 壽福康寧 萬歲樂)’이란 글귀가 문양으로 그려져 있다. 영원히 봄같이 오래 사시고 복을 받으며 강녕하며 만세 동안 즐겁기를 축원한 것이다. 서울택시의 색깔이 바로 꽃담색을 차용한 ‘꽃담 황토색’이라고 한다.

담 중간에는 회색빛으로 얼음이 불규칙하게 깨어진 것과도 같은 빙열문양이 있다. 현대적 추상화에서 볼 듯한 이 문양은 화재에 취약한 한옥에서 불을 막는 벽사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운현궁의 꽃담. 꽃담 속 얼음이 깨진 듯한 빙열문양은 불에 취약한 한옥의 화재를 막는 벽사의 의미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운현궁의 꽃담. 꽃담 속 얼음이 깨진 듯한 빙열문양은 불에 취약한 한옥의 화재를 막는 벽사의 의미이다. 사진 강나리 기자

〈매천야록〉의 기록에 과거 운현궁의 담장 길이가 20리(약 7.85 km)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의 일본문화원, 덕성여대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쓰이는 양관,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가 포함된 넓은 지역으로 규모가 무척 크고 웅장했으나 일제강점기 규모가 축소되고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훼손되었다. 서울시가 대원군의 후손에게서 매입해 일부를 복원했다.

꽃담에는 영원한 봄과 즐거움을 축원했으나 하늘을 찌를 듯한 대원군의 권세는 사라졌다. 운현궁은 이제 도심 속에서도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풍광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