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동북아 선도제천문화의 관점에서 한국 마을제 문화의 제의시설과 제의 신격 및 무속화의 신격을 살펴보았다. 서기전 7200년경 흑룡강성 오소리강변 소남산 지역에서 시작된 ʻ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적석묘·적석총)ʼ은 서기전 4000년~600년경 백두산 서편 고제단 유적(1차: 3층원단·방대, 2차: 선돌2주·적석방단·제천사) 및 서기전 3500년~서기전 3000년경 요서 대릉하 지역 홍산문화 고제단 유적(3층원단류)에서 꼭 같은 형태의 ʻ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로 나타났다. 이는 다시 청동기~초기철기시대 한반도 남부의 ʻ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적석단·나무솟대·제천사·고인돌·선돌류)ʼ로 이어졌다. 환국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수천 년의 긴 시간 동안 요동·요서·한반도 지역을 관통하던 ʻ맥족계 선도제천시설ʼ의 성격이 밝혀지게 된 바 그것은 곧 ʻ서기전 7200년~600년경 요동·요서·한반도(일본열도 포함)의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3층원단·적석단·나무솟대·제천사·고인돌·선돌류)ʼ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오늘날 마을 앞·뒤 산과 마을 어귀에서 볼 수 있는 마을제의 시설(적석단, 고인돌, 신목, 제천사, 장승, 솟대 등)이 ʻ서기전 7200년~600년경 요동·요서·한반도(일본열도 포함)의 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3층원단·적석단·나무솟대·제천사·고인돌·선돌류)ʼ과 형태적·내용적으로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오늘날 마을제의 시설을 선도제천의 유속으로 연결하여  바라보았다.

선도제천문화에서 제천시설뿐만 아니라 신격 문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요서지역 고고 유물 발굴의 성과로 홍산문화 우하량 소도 제천지에서 제천의 신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여신묘(女神廟)가 발굴되어 제천의 신격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여신묘에서 발굴된 반가부좌를 한 선도수행형 여신상은 선도제천의 신격인 ʻ1기·3기ʼ, ʻ하느님·삼신ʼ, ʻ마고삼신ʼ의 상징적 표현으로 한국의 오랜 마고할미신앙이나 삼신할미신앙의 뿌리임을 보여주었다. 또 당대 최고의 선인이자 통치자인 스승왕 삼성은 여신상과 꼭 같은 형태의 반가부좌를 한 수행형 남신상으로 표현되거나 수행 표식(인당혈 표식)이 있는 옥인상으로 표현되어 중심대묘에 부장된 것으로 보아 마고 제천을 주관하던 환웅을 추앙하고 존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웅을 중심으로 한 삼성신앙으로 변화해 갔는데 홍산문화의 수행형 여신상과 남신상을 통해 배달국시대 선도제천의 신격이 마고삼신-삼성이었음을 알게 된다. 단군조선이 와해된 이후 선도사상이 약화되고 중국의 삼교(三敎)의 유입으로 국가 주도의 제천이 민간 속으로 잦아들면서 제천의 신격 또한 변화, 마고→삼성→단군→산신→서낭으로 변천되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제천시설과 제천신격에 대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국 마을제의 시설과 신격, 무속화의 일부 신격을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 마을제의 시설이다. 한국의 마을제 시설은 ʻ구릉성 제천시설ʼ과 ʻ마을로 내려온 제철시설ʼ 양대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첫째 ʻ구릉성 제천시설ʼ 계통의 경우 입지 조건이 하늘과 가까운 산꼭대기나 중턱, 산비탈 구릉지, 마을 뒷산 능선이나 고갯마루 등에 주로 위치하며 적석단, 고인돌, 신목, 제천사 등의 제천시설들이 단종 또는 2종 이상 복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대상 신격은 서낭이나 당신도 가끔 나타났지만 산신이 가장 많았다. 제일은 전국적으로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한 시점이 가장 많으나 예외적으로 경기도에서는 음력 시월 초순경에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상고시대 제천문화 전통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바위와 신목이 있는 제장(祭場)을 각각 ʻ천제당(天祭堂)ʼ으로 부르고 ʻ천제(天祭)ʼ를 지내는 점, 신성한 제장을 의미하는 돌돌림유적의 전통이 이어진 흔적 등은 상고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영고·동맹·무천 등 선도제천문화의 유속이 마을제 전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동북아 선도제천문화의 기준으로 볼 때 전국 각처의 구릉성 산비탈에 위치한 각종 제의시설들의 신격은 언제나 하늘이었고 그 제의는 천제였던 것이다.

둘째 ʻ마을로 내려온 제천시설ʼ 계통이다. 민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산등성이 높은 곳에서 여러 가지 편의상의 목적으로 민인들의 삶 가까운 마을로 내려온 제천시설을 ʻ마을로 내려온 제천시설ʼ 계통으로 보았다. 이 경우 마을 어귀나 마을 앞 도로변, 마을 한가운데나 마을 가장자리 등 민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경우로 솟대와 장승이 추가되는 등 제천시설도 다양해졌다. 단종이나 2종 복합유형보다 3종 이상 복합유형이 많이 나타남도 알 수 있었다. 제천시설이 단독으로 존재하기보다 남녀 짝을 지어 나타나는 경향성이 강하며 호칭 면에서도 할머니·할아버지로 흔하게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산비탈 구릉지에 있던 제천시설이 민인들의 삶의 터전 가까이로 내려오면서 그만큼 저변이 확대되고 대중화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민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산등성이 높은 곳에서 민인들의 삶의 터전 가까이로 내려오면서 제천시설들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3종 이상 복합양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세상살이에 힘든 민인들의 다양한 기원과 바람을 반영한 다채로운 형태의 제천시설들이 만들어지고 ʻ구릉성 제천시설ʼ 계통에서는 보이지 않던 솟대와 장승이 더해지면서 2종 또는 3종 이상 서로 중첩되는 가운데 형태상으로 더욱 다변화되어 갔던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마을제 시설을 양대 계통으로 나누어 다양한 유형을 살펴봄으로써 서기전 7200년경 흑룡강성 오소리강변 소남산 지역에서 시작된 배달국 맥족의 고유한 선도제천시설인 ʻ환호를 두른 구릉성 제천시설ʼ이 한국 마을제 문화로 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하여 고래로부터의 선도제천시설이 마을제 시설로 전해오면서 내용적·형태적으로 정형성을 잃어버리고 시대나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어갔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