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카의 재발견! 새로운 아스테카를 만나다
아스테카의 재발견! 새로운 아스테카를 만나다
  • 정유철 기자
  • npns@naver.com
  • 승인 2022-05-18 1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5월 3일~8월 28일 개최
'태양의 돌', 국립중앙박물관은 5월 3일부터 8월 28일까지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아스테카를 재발견하는 기회이고, 새로운 아스테카를 만나는 시간이다. [사진 김경아 기자]
'태양의 돌', 국립중앙박물관은 5월 3일부터 8월 28일까지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아스테카를 재발견하는 기회이고, 새로운 아스테카를 만나는 시간이다. [사진 김경아 기자]

  남아메리카에서 한때 꽃 피웠던 문명, 아스테카, 마야, 잉카. 이 가운데 아스테카 문명을 유물로 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5월 3일부터 8월 28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이다. 이 전시는 아스테카를 재발견하는 기회이고, 새로운 아스테카를 만나는 시간이다. 왜 재발견인가? 스페인이 아스테카를 정복한 후 아스테카 사람들이 남긴 ‘고문서(Codex)’를 대부분 파괴하였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만든 고문서는 유럽 독자를 위해 제작하여 사실보다 과장하거나 왜곡했을 수 있다. 우리 또한 유럽 독자를 위한 자료를 통해 아스테카, 마야, 잉카문명에 관해 배워 과장 또는 왜곡될 수 있다.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아스테카지만 우리에겐 전쟁과 인신공양의 잔혹한 이미지와 스페인 정복자를 자신의 신으로 오해한 멸망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스테카는 메소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 가운데 하나였으며, 활발한 정복전쟁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공물 징수 시스템으로 메소아메리카 전역을 하나로 연결하였다. 최근 연구와 발굴조사 결과, 아스테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아메리카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고 새로운 종교를 강요하였던 유럽 정복자의 과장과 왜곡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아스테카 역사와 문화의 본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가 잔혹함으로 치부하였던 인신공양과 정복전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처음 개최하는 아스테카 특별전이다.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을 비롯하여 독일 슈투트가르트 린덴박물관,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등 멕시코와 유럽의 11개 박물관이 소장한 아스테카 문화재 208점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

먼저 아스테카는 어떤 곳인가? 아스테카는 14세기 초~16세기 초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번성하였던 도시국가이자 문명, 그리고 종족의 이름이다. 아스테카는 본래 ‘아스틀란(‘하얀 땅’이라는 뜻)출신‘을 의미한다. 11세기 새로운 땅을 찾아 아스틀란을 떠난 이들은 14세기 초에 멕시코 중앙고원 테스코코 호수의 테노츠티틀란 섬에 정착한 후 인근의 도시국가 테스코코, 틀라코판과 함께 삼각동맹을 맺고 멕시코 중앙고원의 중심국가로 성장한다. 이들은 활발한 정복전쟁과 공물시스템으로 맥시코 전역을 하나로 연결하였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스스로를 ‘메시카’라고 불렀다. 이들이 아스틀란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던 중 수호신 우이칠로포츠틀리가 이름을 '메시카'로 바꿀 것을 계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은 자신을 메시카로 인식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 역시 메시카로 인식했다. 그래서 스페인 정복 이후 테노츠티틀란은 ‘멕시코시티’로 바뀌었고 현대의 국명 ‘멕시코’로 이어졌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의 학자들은 메시카 대신 아스테카라는 이름을 선호했다. 과거의 ‘메시카’와 이후의 ‘멕시코’를 구분하여 용어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이들은 메시카 대신 아스테카로 널리 불렀으며, 우리에게도 스페인어 ‘아스테카’ 또는 영어 ‘아즈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스테카의 최근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 이번 전시는 멕시코시티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최신 발굴에서 출토된 중요 문화재를 최초로 공개한다.

1부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은 아스테카 최고의 조각품인 '태양의 돌'을 통해 아스테카 사람들이 이해한 세상의 모습과 그들의 신비로운 신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사진김경아 기자]
1부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은 아스테카 최고의 조각품인 '태양의 돌'을 통해 아스테카 사람들이 이해한 세상의 모습과 그들의 신비로운 신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사진 김경아 기자]

아스테카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다루는 이번 전시는 총 5부로 구성하였다. 먼저 아스테카의 문화와 종교 등 여러 분야를 지배하였던 그들의 독특하고 복잡한 세계관과 신화를 설명한 뒤, 자연환경과 생활 모습 및 정치, 경제 체제를 소개한다. 그리고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모습과 그 가운데의 핵심적인 건축물인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를 볼 수 있다.

1부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은 아스테카 최고의 조각품인 '태양의 돌'을 통해 아스테카 사람들이 이해한 세상의 모습과 그들의 신비로운 신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아스테카 달력이라 알려진 태양의 돌은 1790년 멕시코시의 대광장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이 거대한 석조는 부조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장식했던 색채의 조화로 미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메소아메카 유적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태양이 곧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태양이 탄생하여 세상이 시작되고,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 태양의 신은 가장 중요한 신이었으며, 태양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신성한 제의와 성스런 제물을 바쳤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세상이 총 다섯 번의 탄생과 네 번의 파괴를 거듭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각 세상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다섯 번째 세상, 즉 '움직임의 태양' 세상에 살고 있다.

전시에서 25톤에 달하는 태양의 돌을 3D데이터로 정교하게 제작한 재현품 위에 펼쳐지는 영상은 관련 전시품과 연동되어 관람객에게 아스테카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2부 ‘아스테카의 자연과 사람들’은 다양한 생태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갔던 아스테카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을 살펴본다. 특히 원주민 그림문자로 제작한 《멘도사 고문서》 속 이미지를 활용하여 아스테카의 문화를 생동감 있게 소개한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에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신의 이야기 등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것을 흔히 ‘고문서Codex’라고 부른다. 고문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했지만, 이 내용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문자와 관련한 역사, 문화, 종교, 수학, 의학적 지식이 있어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만이 고문서를 작성하고, 또 해석할 수 있었다. 《멘도사 고문서》는 스페인의 식민지 정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초대 부왕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5세를 위해 1541년 제작한 고문서이다. 아스테가의 역사와 일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설명도 달려있다.

2부 ‘아스테카의 자연과 사람들’은 다양한 생태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갔던 아스테카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을 살펴본다. [사진  김경아 기자]
2부 ‘아스테카의 자연과 사람들’은 다양한 생태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갔던 아스테카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을 살펴본다. [사진 김경아 기자]

전시 자료를 통해 아스테카인들이 고추를 태운 매운 연기를 쐬서 아이를 혼내는 모습, 결혼풍습 등을 볼 수 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주로 옥수수, 콩, 호박, 고추 등을 먹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칠면조와 개를 기르기도 했다. 그중 옥수수는 그들의 주식이었다. 선인장 역시 아스테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고 카카오는 왕과 귀족들만이 먹을 수 있는 매우 귀한 작물이었다.

옥수수와 고추 등 아스테카 사람들의 주식은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식재료가 되었다. 카카오, 초콜릿, 아보카도, 토마토, 칠리, 치아시드 등의 이름도 아스테카에서 유래하였다. 이를 보면 우리 생활 속에도 아스테카 문명이 깊숙이 들어온 셈이다.

3부 ‘정복과 공물로 세운 아스테카’는 멕시코 전역을 하나로 연결한 아스테카의 활발한 정복전쟁과 공물 징수 체계를 살펴본다. 특히 공물은 먼 거리의 도시국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통치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생태환경의 다양한 물자와 문화를 함께 공유하여 멕시코 전역을 연결했다.

아스테카는 활발한 정복전쟁과 공물 징수 체계 및 장거리 교역으로 멕시코 중앙고원을 넘어 태평양과 대서양, 미국 남부, 과테말라까지 하나로 연결하였다.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생산된 물자가 테노츠티틀란으로 집중되었고, 또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유통되었다. 화산지대에서 가져온 흑요석은 철기가 없었던 아스테카 사회에서 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광물이었다. 공물은 주로 3개월, 6개월 또는 1년 주기로 거두었다. 아스테카 통치자의 즉위식이나 장례식, 신전의 증축 등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경우 추가로 부과하였다. 과도한 공물의 부과는 정복 도시국가의 불만과 저항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스페인 정복자는 이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아스테카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4부 ‘번영의 도시 테노츠티틀란’에서는 아스테카의 중심 도시인 테노츠티틀란의 발전상을 살펴본다. 테노츠티틀란은 15~16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이곳에 도착한 스페인 사람들은 도시의 규모와 발전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독수리 머리' 석상과 같이 도시 곳곳을 꾸몄던 아름다운 건축 장식과 귀족들이 사용한 고급 물품과 토기는 테노츠티틀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테노츠티틀란은 수 세대에 걸쳐 건설된 커다란 섬 위에 건설한 도시로 주민들은 호수 주변의 얕은 바닥에서 얻은 퇴적물을 쌓아 올리면서 여러 작은 섬들을 점차 이어 붙여 대도시를 만들었다. 도시 중심에는 거대한 신성 구역이 있었는데, 정사각형의 벽으로 둘러싸여 그 경계가 뚜렷했다. 1521년 5월 스페인 정복자들와 이들의 동맹 원주민 전사들의 포위 공격으로 테노츠티틀란이 파괴되었다. 1524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츠티틀란을 스페인의 부왕령 누에바에스파냐의 수도로 정하고 이후 ‘멕시코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람객들이 아스테카 유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김경아 기자]
관람객들이 아스테카 유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김경아 기자]

5부 ‘세상의 중심, 신성 구역과 템플로 마요르’는 테노츠티틀란의 신성 구역에서 벌어진 다양한 제의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다.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소조상 등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 일대의 고고학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잔혹한 인신공양이 사실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주변 정치집단을 통치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성 구역과 피라미드 신전의 모형, 그 위에 적용한 AR 및 디지털 매핑 영상으로 볼 수 있다. 템플로 마요르는 신성 구역의 동쪽 지구에 위치했다. 정면은 서쪽을 향했으며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당시 템플로 마요르는 113개 또는 114개의 계단이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두 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남쪽에 있는 신전은 태양과 전쟁의 신 우이칠로포츠틀리를, 북쪽에 있는 신전은 비와 풍요의 신 틀랄록을 숭배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비의 신 틀랄록의 머리(사진 오른쪽) 틀라록을 그린 항아리(왼쪽). 틀랄록은 메소아페미카 문화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다양한 종족과 문명이 그를 숭배했다. [사진 김경아 기자]
비의 신 틀랄록의 머리(사진 오른쪽) 틀라록을 그린 항아리(왼쪽). 틀랄록은 메소아페미카 문화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다양한 종족과 문명이 그를 숭배했다. [사진 김경아 기자]

 집회장소를 뜻하는 코아칼코는 우이칠로포츠틀리 신전에 있었다. 코아칼코는 정복지의 신정한 힘을 빼앗는 메시카 관습의 결과로 존재하는 장소였다. 메시카 군대는 승리의 표시로 정복지의 신전에 불을 지른 후 포로로 잡힌 신상(神像)을 등에 업고 기뻐하며 테노츠티틀란으로 돌아왔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희생한 신들에게 제의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기도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신을 위한 선물에는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과 함께 꽃, 조개, 불가사리, 재규어, 늑대, 독수리, 악어와 같은 다양한 동·식물도 있었다. 이에 더해 사람들은 자신의 귓불을 찔러 피를 바치기도 했다. 신성 구역에서 발견한 인간의 유골은 이 신성한 제의에 인간도 제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태양을 움직이고 세상을 지속시키려는 인간의 희생이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에서 희생제의는 세상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지금까지 인간의 두개골이 수천 점 발굴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기록한 수만 명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이다.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사진 김경아 기자]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사진 김경아 기자]

아스테카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을 위한 제의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조상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는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죽은 자의 날' 축제도 그중 하나. 아스테카 예술에 해골과 뼈의 형상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이것을 처음 본 유럽인은 심한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에게 해골과 뼈는 죽음, 악마, 주술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였을 뿐이다. 유럽 사람들은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아스테카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신 조상을 의미한다.

1519년 목테수마 2세가 통치하는 아스테카는 40여 개의 도시국가에 수백 만명이 사는 거대한 국가였다. 면적이 200,000㎢ 이상으로 당시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그해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만에 상륙하였고, 곧 이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단 500명의 병사, 100명의 선원, 16마리의 말과 아프리카 및 쿠키 원주민 짐꾼과 함께 아스테카의 중심 테노츠티틀란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아스테카의 지배를 받던 많은 도시국가들이 코르테스의 편에 서서 그를 도왔다. 결국 테노츠티틀란은 1521년 8월 13일에 함락되었다. 이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오늘날의 멕시코인인 메스티소의 고통스러운 탄생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아스테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이 남긴 고문서에 있는 독특한 그림과 스페인 정복자들이 작성한 자극적인 이야기는 자못 흥미진진하지만, 잔혹한 전쟁과 무자비한 인신공양, 그리고 왕 때문에 멸망한 이야기만 강조되어 왔다. 치열한 전쟁과 희생제의는 어두운 측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여러 연구에서 이런 것들은 침략을 정당화하고 새로운 종교를 강요했던 스페인 정복자의 과장과 왜곡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냈다. 어쩌면 우리도 은연중에 침략자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기록과 현상 너머에 담겨 있는 진실, 전쟁과 희생제의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아스테카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갔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아스테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며, 역사적 사실과 대중의 인식의 차이를 좁혀야 하는 어려운 과제도 남아 있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면 생각할 게 많아진다. 

3
0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