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에 의하면 2020년 4월 기준으로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재는 21개국 193,136점이다. 그중 42.4%인 81,889점이 일본에 있다. 이는 주로 박물관이나 공공기관,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공개된 유물의 숫자일 뿐 개인 소장 반출 문화재는 사실상 정확한 규모나 소재 파악조차 어렵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이영호)는 ‘일제 침탈사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최근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조사》를 발간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4월 11일 '일제 침탈사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조사》를 발간했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4월 11일 '일제 침탈사 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조사》를 발간했다. [사진=동북아역사재단]

집필자인 이순자 박사(숙명여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이번 연구총서에서 강제병합 전후부터 해방 때까지 일제가 자행한 우리 문화재 수탈과 이를 지원했던 법령 및 제도 등을 상세히 다뤘다.

이순자 박사는 한‧일 연구자들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일제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했고 발굴 유물을 ‘만들어진 역사’에 맞춰 재해석해 적극 활용했음을 밝혔다.

그는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이 당시 제도와 법령이 뒷받침된 구조적 시스템 아래서 이루어졌다. 한편, 고적조사를 주로 교토대, 동경대 교수인 관학자들이 진행했는데, 연구목적으로 반출했다가 유물 정리 및 연구목적 달성 후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령과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환하지 않았다. 문화재 수탈이 일본인 관학자나 고위 공직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다”라고 했다.

연구총서에서 문화재 수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우리 문화재 약탈은 병탄 전부터 시작…고분 도굴, 지역 사당의 제기‧향로 훔쳐

개항 후 소수 일본인들이 도항하다 1894년 청일전쟁 직전부터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하급계층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본격적으로 도항했다. 이들은 한국의 고분을 파괴하고 부장품들을 몰래 꺼내는 등 조상숭배 의식을 갖고 있던 한국인들이 상상하지 못한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불법적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변장을 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역 사당의 제기와 향로 등을 훔치기도 했다.

▶ 청일전쟁 때 일본이 제정한 ‘전시청국보물수집방법’…“혼란한 전시에는 ‘명품’ 얻기 쉽다”고 명시

한반도 내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당시 제정한 ‘전시청국보물수집방법’ 내용에는 한국과 청국의 유물과 관련해 “혼란한 전시에는 평시보다 극히 저렴한 가격으로 명품을 얻을 수 있기에, 보물수집원을 파견하여 약탈 또는 매수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보물수집이 “전승의 명예가 따르고, 천세의 기념으로 남을 국위선양”이라고 강조했다.

▶ 日, 청일‧러일 전쟁 승리 후 막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대대적인 도굴 감행, 후손들 보는 앞에서 선조의 무덤 부장품 강탈하기도

러일전쟁 전후에 개성을 중심으로 한 능묘도굴이 들판의 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또한, 러일전쟁 후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군정 하에서 전국에 파견된 12개 헌병 분대와 56개 헌병분견소의 지원으로 도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황수영의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에 의하면, 백주 대낮에 총검을 들이대고 후손들이 펄펄 뛰고 발을 구르는 눈앞에서 선조의 무덤을 유린하고 부장품을 강탈하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헌병과 순사는 물론 퇴역군인들도 도굴에 참여하거나 직접 골동품 거래했다.

▶ 조선인은 고분 파괴 상상도 못해, 평양박물관 관장 고이즈미 아키오 기술

평양박물관 관장을 지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고적발굴만담〉에서 도굴에 관해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을 혐오하는 뿌리 깊은 사상의 소유자인 조선 민족으로서는 어지간한 하급의 무식한 자가 아니면 이러한 일을 감히 하려고 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고분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온 것”이라고 기술했다.

▶ 직업적 도굴단 ‘호리꾼’ 등장

일제강점기 도굴이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대신 ‘호리꾼’이라는 직업적 도굴단이 등장했다. 대개 일본인에게 훈련받은 한국인을 앞세워 도굴을 자행하고, 일부 수집가들은 도굴꾼을 직접 사주하여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기도 했다. 도항해온 일본인에 의해 비공개적으로 시작된 고분 도굴이 경제적 이득을 가져오는 하나의 직업이 됨으로써 약탈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 고위관리가 나서 고려자기 도굴‧반출, 박물관 설립해 유물수집 명분으로 도굴 합리화

도굴로 인해 1900년대 초 고려청자가 일본에 알려지자 도굴범 재판장으로 근무했던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가 변호사로 개업 후 고려자기를 매수하고, 조선공사관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盛義)는 재직시 수백 점을 모아 도쿄제실박물관에 전시실을 마련해 진열했다. 1906년 부임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8년 이왕가박물관(제실박물관)을 설립해 유물을 수집한다는 미명으로 도굴을 합리화하고,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수탈했다. 

▶ 조선총독부 유물 「보존규칙」에 ‘현지보존주의’명시, 오히려 총독부박물관으로 인해 문화재 이탈

테라우치 총독이 1916년 제정한 「보존규칙」의 실시 의미를 밝힌 내용 중 “둘째, 조선의 문화재는 모두 조선 내에 보존하여 국외 산일을 방지하며”라고 현지보존주의를 명시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주요 문화재가 원적지로부터 이탈당하는 중심지가 바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이었다. 이왕직이나 총독부가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유물을 수집한 때부터 발굴이 성행해 한국인들의 반감이 높자 금지하는 방침을 세우려 했다. 그 즈음 이미 많은 사람이 이 일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총독부에서도 정책상 당분간 묵인하였다. 고분 매장유물이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을 수집하는 행위 그 자체가 유물의 ‘파괴’행위였다.

▶ 이토 히로부미, 고려자기를 사들여 30~50점씩 일본관공서나 고관에 기증, 선물

이구열의 〈우리 문화재 수난사〉에 의하면, 범죄에 의한 장물을 전문적으로 취득, 매매, 운반, 보관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최대의 고려자기 장물아비’로 평가될 수 있다. 그는 ‘재산적 가치’, ‘개인적 취미활동’으로 고려자기를 수집해 일본에서 온 사람이나 관직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대대적으로 고려자기를 사모아 한때 경성에서 고려자기 매물이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일본 상인, 고려자기 대량 수집해 외국으로 반출, 판매

오사카의 야마나카 상회는 한국에서 고려자기를 대량으로 사 모아 미국, 영국 등지로 반출, 판매하였다. [2편에서 계속]

[2편] “日 고적조사, 하나의 유적 발굴에 1~5일 졸속…유물 수습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