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박사는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조사》에서 일본 관학자에 의해 진행된 고적조사가 졸속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1920년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을 전개했는데 실제 조사기간이 길지 않다. 하나의 유적이나 고적에 대해 많게는 4~5일, 적게는 하루나 이틀 정도로 처리했다”라며 “고적 조사의 원칙은 원상태를 유지하고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인데 일제의 고적조사는 유물수습 차원이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조사》에 실린 일제의 고적조사 발굴 현장. [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과 고적조사》에 실린 일제의 고적조사 발굴 현장. [사진=동북아역사재단]

이어 연구총서에서 밝힌 수탈의 주요내용을 살펴본다.

▶ 일제가 진행한 고적조사의 역점 사항은 2가지. △역사에서 식민통치의 정당성 찾기 △ ‘문화적 식민통치’ 대내외에 알릴 박물관 건립과 ‘보여주고’싶은 역사로 재구성한 전시

일제는 한국의 역사가 타율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주장을 증명하고자 평양 중심으로 한사군 중 낙랑군 관련 유적 조사, ‘신공황후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의 한반도 지배를 주장하고자 신라와 가야 유적 발굴조사에 집중했다. 이에 일본학자 곤도 요시로(近藤義郞)은 〈전후일본고고학의 반성과 과제〉를 통해 일본 고고학자들이 제국주의에 눈을 감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 1900년부터 고적조사…한국 침탈 앞두고 지리, 역사 등 한반도 전반 파악하는 ‘정찰적 조사’, 강제병합 후 중앙과 지방통치 단기간에 장악할 수 있는 토대 마련

일본의 첫 고적조사는 1900년 도쿄제대 인류학교실에서 파견한 고고인류학자 야기 쇼자부로(八木獎三郞)가 진행했다. 그는 부산을 시작으로 낙동강 좌우 고분을 조사하고 유물을 조사 채집했다. 〈한국탐험일기〉에서 야기는 “후일 도항자들에게 일조하고자 한다”라고 목적을 밝혔다.

1902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고도古都 경성(서울)과 개성, 경주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전장 내지 보급지가 될 지역에 사용 가능한 건축물의 상황을 파악하는 차원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세키노의 고건출물 조사는 일제의 지방행정 통치 시설물로 활용하는데 기초자료가 되어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제가 중앙은 물론 지방통치까지 단기간에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 고적조사 보고서에 중국, 일본과 비교하며 한국 문화의 ‘모방성’ 강조

1902년 고적조사를 마친 세키노 다다시는 1904년 발간한 《한국건축조사보고》에서 시종일관 한국의 건축 및 유물을 중국, 일본의 것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한국 문화의 모방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다.

1904년 도쿄제대는 ‘임나’지역을 선정해 시바타 조예(柴田常惠)를 파견해 가야 지역을 조사하고, 1905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만주 일대의 고구려고분과 광개토대왕릉비를 조사했다.

▶ 고적조사 후 출토품 일본으로 반출, 도쿄제대서 반출된 유물로 전람회 열기도

1909년부터 1911년 세키노에 의해 실시한 고적조사 당시 한국에는 유적유물에 대한 인식부족과 법적 제도적 장치 부재로 아무런 제약 없이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해 도쿄제대 공과대학에 기증했다. 이뿐만 아니라 고적조사 때마다 출토된 유물들은 일본으로 반출해 개인 또는 대학에서 보유했다.

1912년 4월 16일부터 3일간 도쿄제대 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실에서 제4회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조선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가져온 것’이라는 내용으로, 낙랑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을 전시했다.

▶ 아이들 동원해 2시간 만에 200개 기와조각 수집해 도쿄제대에 기증

세키노 다다시는 1913년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평안남도 낙랑 유적과 지린성 지안현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했다. 낙랑토성을 조사 당시 주위의 아이들에게 “전塼 2개를 주워오면 1전을 주겠다”라고 하여 2시간 만에 200여 개를 수집했다. 그 일부를 일본에 가져가 도쿄제대 문과대학 표본실과 도쿄제실박물관 역사관에 기증했다.

▶ 한국의 유물들, 고고학회 참석자에게 추첨으로 나누어 주고 판매

세키노는 고구려 태왕릉 발견의 와전瓦塼 중 벽돌 파편 5개, 기와 파편 10개에 한해 고고학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추첨을 통해 나누어 준일도 있었다. 그러나 학회에 참석하지 못한 지방회원들의 요구가 많아지자 와전 파편 종류에 따라 1엔에서 30전을 납부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 구로이타 가쓰미 ‘임나일본부’에 초점, 그러나 한국식 유물만 나와 실패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는 도쿄제대의 명령을 받아 1915년 4월~8월까지 총 104일간 한반도 남부지역을 답사, 조사했다. 이때 조선총독부의 적극적 지지로 짧은 기간 넓은 곳을 조사할 수 있었다.

구로이타는 “낙동강 연안의 역사를 탐구하여 ‘임나’, 신라‧백제의 국경을 밝히고자 한다”라는 목적을 밝혔다. 그러나 일본식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한국식 유물만 나오자 “이미 도굴 파괴되어 구분이 어렵지만 거기에 일본 취미의 것도 있을 것인데, 이는 좀 더 폭넓게 타 지방의 것도 연구해보면 발견될 것”이라며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 부장품과 분묘도 모두 조선식을 모방하여 구분하기 힘든 것으로, 확실히 일본인이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을 했다.

▶ 구로이타 가쓰미 “한국인은 유물 수집 취미 없고 역사연구에 냉담, 일본인에게 다행”

구로이타 가쓰미는 “한국인이 원래 유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또 역사연구에 냉담한 결과로 유물을 파괴하지도 않았고 보호하지도 않았으며, 그대로 방임한 상태”라고 주장하며 “우리 일본인에게 다행한 점이라. 나도 이번에 유익한 사료를 상상 이상으로 수집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일본 관학자들, 이후 조선역사 편찬사업 관여

1916년 4월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총독부 고등관외에 일본인 관학자들이 주로 참여했다. 고적조사위원회 위원들 가운데는 일제의 조선역사 편찬사업에도 깊이 관여해 식민사관을 역사서술로 구체화 했다.

▶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문화재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문제점

한일협정 당시 불법 반출문화재의 반환이 아니라 양국의 문화관계 증진을 위함으로 논의를 진행해 부속서에 명시된 문화재만 ‘반환’이 아닌 ‘인도’하는 것으로 정했다. 또한, 합의 의사록에 (일본인)개인 소유 민간 문화재의 자발적 기증과 정부의 권장만 언급함으로써 민간문화재의 실질적인 반환문제를 회피했다.

이순자 박사는 향후 대응과 관련해 “한일협정 당시 논의과정이 상당히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 문제점과 한계점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만들어졌으니 좀 더 본격적으로 해외에 나가 있는 문화재들에 대한 소재 파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민간단체에서도 문화재 환수, 반환 관련 활동을 하는데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1편] 강제병합 전부터 문화재 도굴, “이토 히로부미, 최대의 고려자기 장물아비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