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개토대왕비 [제공=국학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은 환웅천황의 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 이후 가장 광활한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국시인 다물(多勿) 정책을 완성한 왕이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이러한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즉위 2년(414년)에 수도 국내성에 높이 약 6.34m(21척), 가로세로 너비 1.3~2m, 무게 37톤에 달하는 기둥 모양의 화강암 비석을 세웠다. 바로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거대한 비석은 서기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 잊혀 졌다가 1400여 년이 훨씬 지난 1882년 세간에 알려진다. 현재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자리하고 있다. 비문의 정식 이름은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廣開土境平安好太皇碑文)’이다.

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개국으로부터 호태왕이 죽기 전까지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 부분은 북으로는 송화강, 서로는 섬서성, 동은 연해주, 남쪽은 일본 열도에 이르는 광개토대왕의 큰 업적을 기록하여 당시 각 나라의 위상과 영역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문이 발견되자, 중국인들은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점령한 내용을, 일본인들은 일본을 점령했다는 글자를 메우거나 쪼아내는 후안무치한 왜곡을 자행하였다. 훼손된 부분이 제대로 해석된다면 우리는 물론 아시아 고대사를 정확하게 밝힐 귀중한 사료가 된다.

셋째 부분은 호태왕의 유훈으로 묘지기와 입비 등 제도의 해답을 적시하여 고구려가 점령한 지역을 확인할 수 있다.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현존의 우리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되었으나 호태왕 비문은 이보다 720년 전에 세워졌다. 중국과 일본에는 이보다 더 오래되고 큰 비석이 없다. 비문의 첫 문장이 “고구려를 창건하신 추모왕(鄒牟王, 고주몽)의 아버지는 ‘천상의 상제님’이고 어머님은 ‘하백 수신의 따님’이었다”라고 말하며 나라와 민족의 정체를 규정한다.

이는 단기 4347년 전, 국조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세운 것을 ‘하늘이 열린 개천절(開天節)’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는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는 가장 오래되고 거룩한 DNA를 관통하는 하늘민족의 핏줄의 역사이다.

국학원장(代), 전국민족단체연합회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