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화 선생님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분이셨어요. 그때의 생활사를 복원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존의 자료 위주의 딱딱한 전시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를 들려줘서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구성했죠.”

내달 13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한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기획한 정명아 전시과장의 말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한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기획한 정명아 전시과장.

전시는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 일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특히 백범 김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임시정부 안살림꾼 정정화의 이야기는 오감(五感)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해 시선을 끈다.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떠난 망명길…중국으로 가는 기차를 타보라!

김가진은 구한말에 주일본판사대신, 병조참의, 충청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 공조판서,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중추원의장 등을 지냈다. 한일병탄 이후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했다. 그때 나이가 74세였다.

“지금은 74세가 많지 않아 보여도, 당시에는 (노인들의) 평균연령이 낮았거든요. 그 나이라면 자신의 생을 정리해야 하는데, 상하이 망명을 결단하고 떠나셨죠. 하지만 고생을 엄청 했더라고요. 돈이 없으니깐 하루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못 했다고 해요. 그 분이 74세의 나이에 빈곤한 삶을 선택하신 거잖아요. 그런 부분이 인간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자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요.“

▲ 내달 13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한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왼쪽부터 아들 김의한, 동농(東農) 김가진,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특별전은 김가진 대례복 초상과 백운동의 동농 글씨, 조선민족대동단 선언문 등 동농 일가의 유물과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이곳이 평면적인 느낌을 받는다면 상하이로 떠나는 기차를 시작으로 입체적인 전시가 펼쳐진다.

모형으로 만든 기차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창밖으로는 1920-30년대 조선의 풍경이 영상으로 지나간다. 고향을 떠나는 독립운동 가족은 어떠했을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도 좋을 듯하다.

갑자기 낮술을 찾았던 백범 김구, 그 이유는?

이어 동농 며느리에서 임정 며느리로 살았던 정정화를 만나보자.

그녀는 임시정부의 살림을 챙겼다. 자금 마련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내로 잠입하기도 했다. 그때의 모습을 압록강의 나룻배를 세트로 만들어놓았다.

“잠입 장면인데요. 실제로 시민이 그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시 밤하늘에 별을 보고 물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처음 그녀가 직면한 임시정부의 생활은 일기로 남아있다.

“식생활이라고 해야 가까스로 주먹덩이 밥을 면할 정도였고, 반찬은 그저 밥 넘어가게끔 최소한의 종류 한두 가지뿐이었다. 상하이에는 국내보다 푸성귀가 풍부했다. (…) 사실 배추로 만드는 반찬이 제일 값이 쌌기 때문에 늘 소금에 고춧가루하고 범벅을 해서 절여 놨다가 꺼내 먹곤 했다.-장강일기”

의복 역시 제대로 갖춰 입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아주 헐값에 천을 사서 짱산(長衫)이라는 중국옷을 만들어 입었다. 신발은 한층 더했다. 헌 헝겊 조각을 몇 겹씩 겹친 뒤 단단한 실로 바닥을 누벼서 신고 다니면 다행이고 대개는 짚신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전시 중에는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하며 등장하는 김구 선생의 밥상 장면이 나온다. 이는 미니어처로 만들었는데, 정정화는 아이를 김구 선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한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에서 정정화의 아기를 안고 있는 백범 김구의 모습이다.

이어 낮술을 찾았던 백범 김구의 방이다.

“점심때가 되어 백범이 나를 찾았다. 몇 분의 점심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는데 (…) 간단하게 점심상을 거의 차렸을 쯤 이동녕·조완구 선생이 왔고 좀 늦게 백범이 도착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식사가 끝난 후 백범이 난데없이 나에게 술 한 병과 신문을 사오라고 일렀다. 평소 술을 입에 대는 일이 없는 분이 더욱이 낮에 술을 찾는 게 의아했다.-장강일기”

이날은 일본군이 상하이사변 승리와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는 축하식이 있었다. 바로 윤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으로 의열투쟁에 성공한 것. 이 일은 중국 주석 장개석이 중국 100만 군대가 해내지 못한 일이라고 평가됐다.

다시 정정화의 일기를 살펴보면, 김구가 빈 도시락을 하나 갖다 주면서 거기에 밥을 담아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윤 의사가 의거 현장에 갖고 들어갈 그 도시락 폭탄과 같은 모형이었다. 남편 김의한은 어느 날 임정 청사에서 가까운 정안사공원을 지나는데 윤봉길이 혼자서 돌멩이를 던지는 연습을 하더라는 것이다. 상하이 한인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동농의 아들(김의한)과 며느리(정정화)가 목격했고 참여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시정부 사람들은 상하이를 떠났다. 정정화․김의한 부부 역시 아들을 데리고 중국 대륙 위를 떠도는 피난길에 들어섰다.

▲ 특별전시 ‘조국으로 가는 길-한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에서 물 위에 뜬 망명정부를 목선으로 연출했다. 또한 일제의 폭격을 대비한 충칭(重慶)의 방공호를 재현했다.

전시는 물 위에 뜬 망명정부가 목선으로 연출했다. 배 돛은 뮤지컬 <장강일기>가 영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일제의 폭격을 대비한 충칭(重慶)의 방공호를 재현했다. 직접 들어가고 나올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 장면은 묘가 등장한다.

“동농 선생은 중국에서 돌아가셨고, 상해에 있던 묘는 중국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것이 후손으로서는 한(恨)이죠. 김의한 묘는 평양에 있고 정정화 묘는 대전 현충원에 있어요. 지금 우리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흩어진 묘로서 엔딩(ending)을 만든 거죠.”

전체적으로 연극적인 무대연출과 음향효과가 탁월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배경음악이 달랐다. 정명아 과장은 1년 동안 시나리오 쓰듯이 작업했고 음악 또한 직접 작곡했다고 밝혔다.

한편 박물관 측은 관람객 이해를 돕고자 전문가들이 동농일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직접 설명해주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진행한다. ▲10월 1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10월 8일 김위현 전 명지대 교수이다. 강연은 무료이며 당일 현장에서 선착순 50명을 모집한다. 자세한 사항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를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