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특집 - 한국여성독립운동가, 이제는 Her-story를 만나자

“역사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시각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겨있고, 우리 선조들의 피와 노력이 일구어낸 결과입니다. 과거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건 행보가 민족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상기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바로 역사에 담겨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은 광복절 특집 인터뷰에서 청소년의 역사에 대한 무지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교육’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심 소장은 “입시 위주의 교과편성과 일회성 교육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 정체성을 바로 알고 나라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정부의 변화된 행보와 시민단체의 행보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부산에서 국내 유일의 여성독립운동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심 소장은 프로필이 이채롭다. 부산대학교에서 강원도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 연구로 1호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유족이 아니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소개된 윤희순 의사를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이틀 뒤 보따리를 싸들고 강원도로 달려갔다고 한다.

다음은 이메일 인터뷰 전문

▲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 소장님은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인가요?

“지난겨울에 지역의 여성사 연구를 하는 분과 통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직접 제주여성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 주 비행기 표를 손에 들고 있어요. 꼭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직접 확인해야 하는 성격이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 언제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제 인생의 멘토는 할아버지이십니다. 열두 살 때부터 집안의 가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인생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한국독립을 위해 투신한 독립운동가와의 만남을 말씀하셨을 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나라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뒤켠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선명합니다.”

- 여성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의사가 널리 알려진 이유는 삼일운동에서 이화학당 출신 여학생의 활동이 이화학당 외국인 교장에 의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겠다고 협박하여 시신을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관심으로 인해 한국여성독립운동 부문이 삼일운동의 여성 활동에 집중되었습니다.”

- 많은 여성독립운동가 중에서 윤희순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적 근간은 의병정신에서 비롯됩니다. 윤희순이라는 인물의 발견은 정말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한말시기에 최초 여성의병장이 나왔다는 사실, 유교세력이 강했던 강원도에서 여성의병단체가 나왔다는 사실은 바로 잠재되어있었던 여성의 나라사랑정신을 의미합니다.”

-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우당 이회영 일가가 유명합니다. 그런데 윤희순 또한 가족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시댁과 친정을 아울러서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힘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보십니까?

“친정집안의 인성교육과 시댁집안의 나라사랑이 윤희순을 통해서 발휘됐다고 봅니다. 윤희순의 유년시절을 보면 솔선수범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생활화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족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시각이 국가로 확장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개인-가정-사회-국가의 연결 구도가 윤희순의 삶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가정과 사회, 국가를 지키려는 여성의 잠재된 구국의식을 이끌어내어 ‘안사람 의병단’을 만들 수 있었고, 우리 가족부터 솔선수범해서 나라사랑을 실천하자는 의지가 ‘가족부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홍석(의병장), 남편 유제원(독립운동가), 아들 유돈상(독립운동가)은 화서연원 항일구국운동 인맥도에 올려져 있을 만큼 그 활동이 주목되었던 분이고, 손자 유연익씨는 광복회 강원도 지부 회장이셨습니다. 이 가계를 살펴보면서, 이들의 독립운동을 이어준 맥이 바로 윤희순 의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나라사랑정신을 키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 지금이야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왕성합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 안사람을 설득해서 의병단을 이끌었습니다. 중국에 가서도 중국 사람을 설득해서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일본을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은 마치 정치인의 연설을 듣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윤희순의 리더십이 주목됩니다.

"전통과 근대가 상존하는 시기에 유교집안의 여성이 ‘여성의병단’을 이끌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부분입니다. 시작은 유교집안의 여성이었던 윤희순이 중심이 되었지만 참여는 마을여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양반여성과 일반여성이 참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었습니다. 윤희순은 의병가사(한글)를 제작하고 배포하며 여성의 구국의식을 고취했고 의병활동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중국사람들을 설득해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침략에 항거하자고 중국인들에게 벼농사 기법을 전수하며 몸소 실천했던 솔선수범정신이었습니다.

윤희순의 소통기법은 자신은 낮추고 타인과 협력하는 것, 부당한 일제침략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부당함에 대해 중국인과 공감대 형성을 기반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상황판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한국여성의 활약상을 보면, 현대 여성의 리더십이 발휘되었던 사례가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사례보다 한국사례의 발견을 통해서 한국여성리더십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대는 다르지만, 현대사회에서 주목받는 여성의 역할이 바로 소통, 솔선수범정신, 공감대 형성, 상황판단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윤희순은 의병가사에서 조국을 부모라고 표현했습니다. 국가를 피와 정신이 숨 쉬는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국가 안위보다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시되는 현실에서 윤희순의 정신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윤희순에 있어서 조국은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으로 우리 민족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조상님들이 일구어온 터전, 내 부모가 계신 곳, 내 가족, 내 민족이 숨 쉬는 곳이기 때문에 국가를 피와 정신이 숨 쉬는 생명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앞서는 오늘날, 윤희순의 독립운동과 그 독립운동에 배태된 민족정신은 잊혀져 있는 나라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 독립운동과 함께 오늘날 역사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청소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방송으로 보도되면서 정부는 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자 하고 시민단체는 100만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청소년 역사교육의 무지를 말하기 이전에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입시 위주의 교과편성과 일회성 교육에서 벗어나서 우리민족정체성을 바로 알고 나라사랑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정부의 변화된 행보와 시민단체의 행보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사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시각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겨있고, 우리 선조들의 피와 노력이 일구어낸 결과입니다. 과거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건 행보가 민족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상기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 바로 역사에 담겨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그런 점에서 보면 윤희순은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중국에서 동창학교(설립자 윤세복)의 분교로서 노학당을 세웠습니다. 평전을 읽어보니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진 것은 진정한 나라를 위한 교육이 없는 까닭이니 참으로 인재양성이 시급하다.” 畏堂先生三世錄 중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국외에서 독립활동을 했던 원동력과 그 기반은 교육기관의 설립을 통한 인재양성과 애국계몽이었습니다. 국권이 상실된 나라 없는 설움의 현실보다 민족자부심을 고취함으로써 독립활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 원동력이 된 셈입니다. 그래서 윤희순 의사는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 연구소 운영하면서 고비는 없었는지요?

“고비보다 제 역량을 갖추어가는 것이 지금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주변의 관심입니다. 경북에서 역사학과 대학생들이 ‘한국여성독립운동가’에 관심이 있다며 연락해온 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영어점수와 스펙과 싸우고 있는 지금, 우리는 보여주기 위한 자신을 만들려고만 할 뿐, 우리의 정체성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저의 과제이자 우리 세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 아들을 가슴에 묻고 75세의 일기로 순국한 윤희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사자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한민족의 원수를 갚고 우리 가족의 원수를 갚고 한국의 국권을 찾기 위해 지금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권을 찾기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서 국외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름 모를 무덤과 비석, 표식이 현지에 있지만 이에 대해 우리는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천 번, 아니 만 번’의 두드림을 했던 우리 선열들의 외침과 목숨을 건 행보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들의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 담금질이 있었기에 오늘날 아들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현세대가 올바른 역사 세우기에 담금질을 해야 할 때입니다.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이들의 값진 값어치가 허물지 않도록 독립운동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리겠습니다.“(사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제공)

3편에서 계속됩니다.
 

1편 여성독립군의 리더십과 자녀교육(클릭 )  
2편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인터뷰
3편 꽃처럼 산화한 여성독립운동가…그들을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