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서울지방보훈청이 후원하는 현충시설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과 함께하는 현충시설탐방’을 매주 실시한다. 그 세 번째 탐방지는 장충단 호국의 길에 있는 현충시설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1일 학생과 학부모 120여명이 탐방에 참가해 장충단의 역사를 직접 찾아갔다.장충단은 충(忠)을 장려하는 제단이라는 뜻으로 고종황제가 1900년에 세운 우리 민족 최초의 현충시설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에게 항거하다가 전사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장병들을 위한 사당을 건립하였고 이후 궁내부대신 이
71세에 안동을 거점으로 활동한 항일 의병부대인 안동의진의 2대 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문집 책판이 독일의 작은 경매에 나와 매입‧환수해 국내로 들어왔다.문화재청(청장 정재숙)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하 재단)이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를 모티터링하는 과정에서 지난 2월 독일 경매에서 발견해 3월 매입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소장하던 것으로, 유교책판을 전문적으로 연구관리하는 한국국학진흥원과 긴밀히 협의해 마침내 독립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돌아온 ‘척암선생문집책판’은 을 찍어낸 책판 1천여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은 코안스피릿이 올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10명 가운데 한 분이다. 3.1절을 앞두고 이상룡 선생의 일생과 독립투쟁을 소개한다.석주 이상룡 선생은 1858년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상희(象羲), 호는 석주(石洲)이며, 1911년 중국 망명 이후 상룡(相龍)으로 고쳤다.이상룡 선생은 어려서 유학을 익혀 개화정책이 추진되자 유교의 예교질서가 무너질까 염려하여, 1890년 자신의 집 임
임시정부 초창기 활동을 기록한 ‘도산 안창호 일기’와 을미사변 후 의병항쟁 활동을 기록한 의병장 민영호의 일기 및 서한인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7일 항일독립유산인 2건을 문화재 등록한다고 밝히고, ‘일제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와 ‘완도 소안면 구 당사도 등대’, 그리고 대일항쟁기 배우이자 감독의 기록인 ‘윤봉춘 일기’를 문화재로 등록예고 했다.문화재청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항일독립 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문화재로 등록하여 체계적인 보수정비를 추진하겠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 다음해 고종황제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해 약 1년 간 거처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122년 전 고종이 세자와 함께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던 통탄의 길이 시민에게 개방된다.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광복73주년,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아 3년간 복원 공사를 마무리한 ‘고종의 길’을 10월 정식 개방하기 전 8월 한 달간 국민에게 시범 개방한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을 지나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 길이
서울지방보훈처 후원 2018현충시설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두 번째 답사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하는 호국역사탐방’에 나서 4월 2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남산팔각정을 답사했다.장충단은 을미사변과 임오군란으로 순사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1900년 고종이 건립하였던 현충시설이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다.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도무지 역사관념이 없어 단기삼국(檀箕三國)이 어떤 역사인지 알지 못하고 조국정신이 나날이 없어지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단군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역사를 《대동사(大東史)》로 펴낸 독립운동가 류인식(1865~1928)의 말이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2년 저술에 착수해 1917년 초고를 완성했다. 이후 1920년까지 수
“귀향”은 영화가 아니고우리 아버지 어머니 시대의 뼈아픈 역사이며 진실입니다.“귀향”은역대 정부가일본과의 외교적인 마찰 등을 우려하면서그토록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눈감고 넘어가려 했던 역사적 진실입니다.우리의 뼈아픈 역사가 끝나지 않고 오히려 반복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진실을 애써 감추고 왜곡하며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제 귀향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의 중심이 나라는 것을 알고자 함일 것이다. 또 역사를 통해 나와 우리의 개념을 파악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의 정의를 ‘아와 피아 간의 투쟁’이라고 했다. 이것은 존재인식과 연관이 있는 정의다.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생후 6개월부터 18개월 사이의 유아는 '거울단계'를 지
통일은 치유다 박정배 시인 광복 70년분단 70년갈등 70년한민족의 아픈 마음어느 누가 대신 할 수 있을까미국도일본도중국도러시아도 몰라통일은 의사에게 맡기는치료가 아니라스스로 쾌유하는 치유다자연치유다단군조선 폐관(閉關) 후첫 번째로 통곡한 민족 혼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통일신라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중국 사대주의 중독(中毒)에 대한 치유구한말 을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