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한 박사
온 누리에 철쭉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하는 4월, 봄은 점점 무르익어 갑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이 있습니다. 바로 4월 29일, 매헌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일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의 뜻은 ‘바람을 뚫고 꽃을 피워 세상에 맑은 향기를 가득 퍼뜨리는 매화 같은 존재, 그런 매화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고결하고 아름다운 호(號)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호만 보면 그 어디에서도 폭탄 의거를 감행한 인물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무고한 다수를 향한 무차별 테러가 아니라 조선을 무도하고 잔인하게 짓밟은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을 겨냥한 정의로운 행동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 어머니 김원상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한 발이 넘는 구렁이가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윤우의였으며, 1918년 11세에 덕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일제의 식민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습니다.
13세가 되던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그는 예산 지역에서 존경받는 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이 운영하던 오치서숙에서 신학문과 농촌 문제, 조선의 독립 문제 등에 대해 배웠습니다. 매곡은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고, 윤 의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대해 깊이 깨달았습니다.
매곡은 윤봉길에게 자신의 호 ‘매곡’과 성삼문의 호 ‘매죽헌’에서 각각 한 글자를 따서 ‘매헌(梅軒)’이라는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이는 한겨울 추위를 견디며 꽃을 피우는 매화의 기개와 성삼문의 충절을 본받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윤 의사는 오치서숙에서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수많은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장력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오치서숙 재학 시절은 물론 졸업 이후에도 농촌 계몽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무지는 일제의 식민 지배보다 더 무섭다”는 신념 아래 농촌 청년을 대상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1927년에는 《농민독본》을 펴냈고, 1928년에는 부흥원과 월진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계몽 운동만으로는 조국을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좀더 직접적인 행동을 결심하며 중국으로의 망명을 계획했습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아내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물 한 대접을 받아 마신 뒤 집안을 둘러보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홀연히 집을 떠났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2세였습니다. 1931년, 윤 의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고, 1932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사무실 청소를 하던 중국인조차 수년째 임금을 받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치밀히 준비하였습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서 히로히토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습니다. 이후 김구 선생은 그 교훈을 바탕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더욱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수차례 폭탄 실험 끝에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제작하여, 윤 의사에게 최적의 폭탄을 전달했습니다. 결국 그는 폭탄 투척에 성공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거사를 이루게 됩니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기념식이 열린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는 일본 주요 인사들이 모인 연단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했습니다. 폭탄은 ‘기미가요’의 마지막 소절이 끝날 즈음 정확히 터졌습니다.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는 직격탄을 맞고 다음 날 사망했으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고 5월 26일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주중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와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각각 중상과 왼쪽 다리 절단, 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오른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연단 주변 일본 병사들 수십 명도 중상이나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백만 중국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했고,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서도 영국과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유족에게 ‘장렬천추(壯烈千秋)’라는 휘호를 선물했습니다. 이는 “천 년을 두고도 길이 남을 장렬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인 시인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리며 한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태극기 아래 정기는 무지개와 같구나.
조선에 군자가 많아 봤자 3천만일 뿐이거늘
춘신강변에서 큰 폭탄이 적을 휩쓸고
우리 4억 중국 백성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의거 직후 윤봉길 의사는 체포되어 상하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같은 해 5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이봉창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것과 달리 윤봉길 의사가 총살형을 당한 것은 일본이 그를 상하이 임시정부 특공대원, 즉 교전국의 군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의거 당시 사망한 일본 군인들을 ‘전사’로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의 노력으로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정부는 그의 숭고한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충남 예산의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유언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 장교 몇 명을 죽인다고 해서 독립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에도 인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잠들어 있는 조선 청년들의 혼을 깨워주고 싶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