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월 8일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출생한 지 144주년이 되는 날이다. 시간을 내어 단재의 기념관과 묘소가 있는 충북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를 방문했다. 이곳은 선생께서 어릴 적 자란 곳으로 친조부의 고향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고향은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도임마을로 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 길 47이다. 천안 흑성산 독립기념관 맞은편 서쪽 능선 자락에 있는 국학원 1층 전시관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커다란 사진과 어록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곧은 정신이 국학원의 설립 이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6년 2월 18일, 신채호는 8년간의 혹독한 옥중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뤼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바로 전 해인 1935년, 기나긴 노역과 얼음장 같은 추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뤼순 감옥 측은 병보석 출감을 통지했으나, 그는 보증인이 친일 인사라는 이유로 출감을 거부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살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너무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유언하기를, 일제가 그의 육신을 밟고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화장해서 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의 고향인 지금의 기념관 터에 몰래 매장되었다. 당시 지역 면장이 일본 몰래 유해를 이장하여 숨겼다가 발각되어 파직되는 수난도 겪었다고 한다.

기념관이 있는 곳은 그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 고향 인근인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여 자란 곳이다. 바로 이 귀래리가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자 화장한 후 안장된 곳으로, 후에 청주시가 단재신채호기념관과 사당을 조성했다. 기념관과 사당, 그리고 묘소가 잘 조성되어 산골 구석진 곳임에도 방문객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산동삼재’(산골마을의 3명의 천재)라고 해서 단재 신채호, 예관 신규식, 신백우 3명이 총명하기로 꽤 유명했다. 단재는 10세 때 벌써 《자치통감》을 해독하고 행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이내 사임하고, 1905년 일본의 식민지배가 가속화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계몽 활동에 전념하였다.

신채호는, 28세인 1907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신민회가 설립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뛰어난 필체로 수많은 글과 논설을 써 계몽운동을 펼쳤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쓴 대표적인 글이 <독사신론(讀史新論>이다. 1908년 8월 27일부터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국한문체 논설이다. 같은 해 9월 15일까지 1차분을 연재하고,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2차분을 연재하여 총 50회까지 발표하였다. 이는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글로, 당시 일제의 영향을 받아 조선 사학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단군부정론(檀君否定論)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불식하고,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일깨울 목적으로 집필하였다.

특히 이 논설에서 기자(箕子)·위만(衛滿)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하였다. 즉 한국 민족은 부여족·선비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 여섯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다섯 종족을 정복하고 흡수함으로써 동국(東國)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민족이 단군의 후예이며, 부여족이 중심 종족임을 밝히고, 기자를 정통에서 몰아내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부여족 쇠퇴의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을 민족적 시각에서 비판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처음으로 왕조 중심에서 벗어나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진보적인 글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대한협회월보》에 <대한의 희망>,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수많은 글을 실었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 복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만주의 고구려 고분군 등 유적을 수차례 탐방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조선상고사》라는 역작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신채호는 우리의 뿌리는 단군이며 단군조선은 삼한(삼조선)으로 이루어졌다는 조선삼한론설을 주장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도 그의 주장은 역사학계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가장 대표적인 글이다. 1923년 의열단장인 김원봉의 요청으로 쓴 이 선언은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등 다소 과격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라가 없어진 항일독립운동기에 의열단원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가와 한국의 전 민족 구성원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문서로 취급되고 있다. 실제로 의열단원들이 <조선혁명선언>을 가슴에 간직하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는 일제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평소에 세수할 때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여 가슴 쪽에 물이 흘러서 옷이 전부 젖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같이 강직했던 그의 성격으로 인하여 타협을 모르고 행동하여 손해도 많이 보고 고통도 겪었다.

49세가 되던 1928년, 신채호는 대만 지룽우체국에서 유문상이라는 가명으로 독립자금으로 현금을 인출하려다 발각되어 ‘외국위체위조사건’이라는 죄목으로 대련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위조지폐 사범이라는 의미다. 독립자금 확보를 위하여 화폐를 위조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대련 관동청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방청객이 너무 많아서 일제가 매우 긴장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자 중에서 거물 중에 거물인 신채호 선생을 오래 가두기 위하여 징역 10년형을 선고하였다.

그는 1930년 4월 뤼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36년 운명할 때까지 갖은 고문과 추위 등으로 지옥과 같은 고생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피감 사진을 보면 코가 내려앉아 있는데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보인다. 끝내 1936년 차디찬 뤼순 감옥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마감했다. 정부는 1962년 신채호 선생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선생을 생각하며 국학원에 전시한 어록을 다시 읽어본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