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ㆍ형사 소송실무를 알 수 있는 책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이래 확립된 소송 법규를 종합·정리한 민·형사 소송법서 《결송유취보》를 최초로 완역하고, 그 내용과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풍부한 해제와 해설을 수록한 신간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역주》(전경목·김경숙 외 역)를 펴냈다.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역주' 입체 표지. 이미지 한국중앙연구원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역주' 입체 표지. 이미지 한국중앙연구원

《결송유취보》는 의령현감 이지석(李志奭, 1652∼1707)이 1649년 편찬된《결송유취(決訟類聚)》를 증보해 1707년(숙종 33) 개간한 사찬 소송법서다. 《결송유취보》에는 《결송유취》(1649), 《대명률》(1397), 《수교집록》(1698) 등의 법률서가 대폭 인용됐다. 특히 《대명률》의 형사소송 관련 내용이 대폭 포함되어 《결송유취보》는 조선 후기 유일한 민⸱형사 소송지침서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 대법전인《경국대전》(1458) 이후 확립된 소송 법규를 종합⸱정리해 조선 후기 새로운 국법체계를 수용한《속대전》(1746) 이 편찬되기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 이 《결송유취보》라 할 수 있다.

《결송유취보》에는 △친족 간 같은 관사에서 근무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다룬‘1.상피(相避)’조목, △말로 다투다가 때린 범죄를 다룬 ‘2.투구(鬪歐)’조목을 시작으로 △남을 욕하거나 헐뜯는 범죄를 다룬 ‘16.매리(罵詈)’조목, △잡다한 부류의 범죄를 다룬 ‘17.잡범(雜犯)’조목을 거쳐, △묘지소송에 관한 ‘42.산송(山訟)’ 조목까지 총 42조목 516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송유취보》이 나오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결송유취보 역주' 표지.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결송유취보 역주' 표지.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 법전 편찬에 힘썼다. 통일법전 제정과 지속적인 편찬을 통한 법치주의 통치는 조선시대의 법제사적 특징이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은 크게 다섯 가지를 꼽는다. 첫째, 조선 최초의 공적인 법전이자 조선 창업군주의 법치주의 이념을 담은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태조 6), 둘째, 조선 법률 체계의 기본 뼈대가 되었던 《경국대전》(1485, 성종 16), 셋째, 《경국대전》 편찬 이후 약 250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법전 조항을 수록한 《속대전(續大典)》(1746, 영조 22), 넷째, 《경국대전》, 《속대전》 및 이후 등장한 법령까지 하나로 합한 《대전통편(大典通編)》(1785, 정조 9), 다섯째, 《대전통편》 이후 등장한 수교(受敎: 관서에서 받은 왕의 명령)와 조례(條例: 왕의 명령과 관사의 관례를 모아서 정리한 규정) 등을 덧붙여 정리한 조선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1865, 고종 2)이다.

조선은 예(禮)로 다스려 형벌과 다툼이 없는 ‘무송(無訟)의 경지’에 이른 사회를 지향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신분과 관계없이 억울한 사람이면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 그런데 소송 절차 규정이 육전 체제에 따라 흩어져 있어 실제 소송에서 법을 적용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판결은 일차적으로 고을 수령이 담당했고, 재판은 수령으로서 자질을 드러내는 지표였다. 적법한 판결을 위해서 수령이 기본 법전을 비롯한 방대한 법령을 일일이 확인하여 해당 사건에 부합하는 조문을 찾아야 하는데, 여러 법전에 산재한 법률 지식을 완벽하게 섭렵하기란 쉽지 않았다. 과거시험 과목에 《경국대전》 등이 있었지만, 내용이 소략했고 암기식 공부만으로는 실무에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국대전》, 《대전속록》, 《대명률(大明律)》 등 여러 법전에서 사송(詞訟: 민사 재판)에 필요한 조문을 뽑은 민사 소송법서 《사송유취(詞訟類聚)》(1585)의 등장으로 수령이 송사에 대비하는 구체적인 지식을 갖추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이는 18~19세기 지방관이 지방을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연구한 학문 체계인 목민학(牧民學)의 효시로 꼽힌다.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원본 이미지(표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원본 이미지(표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송유취》가 나온 후 《결송유취(決訟類聚)》(1649)가 편찬되었지만 그 내용은 거의 동일했다. 다시 약 60년이 흐른 1707년(숙종 33) 의령현감 이지석(李志奭)은 《결송유취》를 증보한 《결송유취보》를 편찬했다. 《결송유취》를 증보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송유취보》는 독자적인 책이었다. 내용 면에서 《결송유취보》는 42조목 516조문으로, 《결송유취》(24조 250조문)에 비해 2배 이상 방대하다. 또 성격 면에서 《결송유취보》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민·형사 소송법서로, 《결송유취》의 민사 재판 내용에 옥송(獄訟: 형사 재판) 관련 내용을 포함했다. 이는 《결송유취보》가 전체 조문 가운데 3분의 1만 《결송유취》에서 가져오고, 나머지 3분의 2는 조선시대 현행법·보통법으로 적용되었던 《대명률》과 개별 법령을 모은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에서 조목과 조문을 가져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양형에 따라 신체에 가하는 형벌을 체계화한 <오형도(五刑圖)>와 재물을 내고 형 집행을 면제받는 규정을 정리한 <수속도(收贖圖)>를 수록하여 형사 소송법서의 면모를 온전히 갖췄다.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원본 이미지(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원본 이미지(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결송유취보》에는 소송 절차법이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수록됨으로써 조선 후기의 법률적 요구가 잘 반영되었다. 《결송유취보》의 <물허청리(勿許聽理)>, <청리(聽理)>, <문기(文記)>, <호적(戶籍)>, <결송일한(決訟日限)>, <작지(作紙)>, <금제(禁制)> 등의 조목은 청송(聽訟: 송관이 분쟁 당사자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듣고 심리하는 것)의 공정성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 법률서에 비해 진전된 것이라 평가받는다. 특히 소송 절차 관련 조항을 하나로 모아 정리한 <청리>는 소송 관계 법규가 독립된 항목으로 설정될 만큼 소송이 다반사였고, 분쟁 해결을 위한 절차법적 규정이 다수 마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1746년(영조 22) 편찬된 《속대전》에도 이어져 <청리>와 <문기> 조목이 신설된다.

《결송유취보(決訟類聚補 역주》는 전경목(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경숙(서울대 교수) 등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7년 동안 번역 및 교감, 해제 집필을 진행하고 수정과 첨삭을 거듭한 끝에 펴낸 역주서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법률과 재판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당시 사회적 영역에 법이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줌으로써 당시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결송유취보》 최초 완역이 이제야 이루어진 점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