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근역성보관은 고려시대에 만든 주황색 직물(織物) ‘주황 석류문 직금사’를 소장하고 있다. 이 직물은 고려 충혜왕대인 1346년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에 들어있던 불복장 유물 중 하나이다. 이것은 주황색으로 물들인 모시실을 날실과 씨실로 직조한 바탕직물 위에 금박을 얇게 펴 붙인 금사(金絲)로 문양을 짠 ‘직금(織金) 모시’이다. 당시 직금을 만들 때 바탕직물로 비단을 쓴 예가 가장 많았지만, 이렇듯 모시를 쓰기도 했다. 견사에 모시나 죽(대나무) 섬유를 날실과 씨실로 엮어 짠 특수 교직을 만들어 그 위에 금사나 은사로 장식한 ‘직금 교직(交織)’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제국 직금 기술을 고려산 직물이나 견·저 교직물에 적용함으로써 중국인들의 눈에 ‘친숙’하면서도 ‘이채’로운, 차별성과 특수성(상품성)을 극대화한 외국산 특이상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강한 지음 '새로운 직물의 탄생' 표지.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이강한 지음 '새로운 직물의 탄생' 표지. 이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강한 교수가 최근 한국학연구원 출판부에서 펴낸 《새로운 직물의 탄생-원제국을 겪은 한반도인의 선택》은 고려와 원제국이 공존하던 시기 고려가 ‘주황 석류문 직금사’와 같은 직물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분석한다. 즉 원제국, 아랍, 인도 등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새로운 직물을 끊임없이 개발해 냈던 고려 후기~조선 초 한국인들의 직물 생산과 수출의 역사를 검토한다. 새로운 직물이란 크게 두 가지이다. 원제국의 출현을 본 고려인들이 제국의 직물로부터 자극과 영감을 받아 만들어 낸 고려만의 특수 직금(織金)인 ‘직문저포(織紋苧布)’, 그리고 제국의 몰락 와중에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한반도인이 새로이 구축했던 여러 교직물(交織物)이 그것이다.

이 책 제1부에서는 후기 고려인들이 제국의 ‘직금’으로 겪은 문화적 충격과 경제적 변동을 검토하고 그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기존의 모시 시문에 작금 기법을 활용했을 가능성을 검토한다. 직금(織金)은 금사(金絲)나 은사(銀絲) 등을 사용한 시문(施紋) 기법을 지칭하는 동시에, 그런 기법으로 문양을 표현한 직물들까지도 가리킨다.

고려와 원제국이 공존하던 13세기 이래, 한반도 직조업계는 외부 직물의 유입, 그로 인한 국내 직조 환경의 교란, 기존 수출품의 위상 변동 등 녹록지 않은 환경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한반도에는 내부의 전통과 외부의 영향을 고루 반영한 새로운 직물들이 등장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원제국의 출현 이후 여러 경로로 고려에 대거 유입된 중국산·서역산 직금의 황홀한 자태에 반한 고려인들은 이를 다량 수입해 소비하고 나아가 자체 생산에도 돌입하였다. 그러나 여러 금속사를 제작하기 위한 금·은의 확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바탕직물로 쓸 양질의 견사 확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고려산 후발 직금으로 제국의 선진 직금 견직물과 경쟁하기란 승산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고려는 기존의 직금과 금사자수 기법을 계속 사용하면서 바탕직물을 견직물 대신 고려만의 새로운 우수 인피(靭皮)직물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직금기법과 인피직물이 더해져 이른바 직문저포가 탄생되었다. 또한 직물을 다양하게 교직하여 새로운 직물도 만들었다. 이러한 창출에는 원제국시대 중국뿐만 아니라 아랍, 인도, 중국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 거점국에서의 방문 등이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직물의 탄생-원제국을 겪은 한반도인의 선택》의 제2부에서는 고려 말~조선 초 한반도의 직물업계에 닥쳐 온 새로운 도전들을 검토하고, 그에 직면한 한반도인들의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해법을 강구했음을 살펴본다. 이를 보면 한반도인의 대응이 매우 기민했다. 중국의 모직에 비견되는 한반도산 피화가 구원투수로 등장하고, 무엇보다도 중국과 차별화된 교직의 전통이 새로이 구축되어 중국과 해외를 공략한 것을 통해, 직문저포의 위상 약화를 또 하나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13~14세기 제국을 겪었던 한반도가 15세기까지 3개의 세기에 걸쳐 새로운 직물을 끊임없이 만들어갔다. 이처럼 새로운 직물의 끊임없는 개발로 점철된 13~15세기 한국 직물의 역사는 제국을 겪은 한반도 선택의 역사, 그리고 내부의 전통과 외부의 영향을 고루 활용한 혁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국의 직금기법을 도입하되 바탕직물로는 인피직물을 쓰는 변용을 통해 직금 인피를 개발하고, 금사자수 기법을 피화에 적용하며, 교직의 전통을 소환하여 견사에 인피섬유 또는 목면섬유를 합직하는 등, 일반 견직물, 인피섬유, 목면제품, 가죽 제품 모두에 비해 특화된 제품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직물들 중 일부는 단명하기도 했겠으나 그 유산은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졌을 것이다. 과거의 전통과 외부의 영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시 직조인들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한국 중세 직물사의 중요한 유산으로 소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직물의 탄생-원제국을 겪은 한반도인의 선택》은 다양한 문헌 기록과 사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책이라는 점에서도 돋보인다. 이강한 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사서는 물론이고 동시대를 기록한 중국의 사서를 비롯하여 일본, 미국, 유럽 등의 연구서를 교차 비교하면서 고려인들이 원제국의 직금 직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특수 직금 직문저포와 고려 후기~조선 초까지 한반도인이 생산한 다양한 교직물을 검토하였다. 오랫동안 고려사는 연구해온 저자의 수고로 우리는 13~5세기 한국 직물의 생산과 수출의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한반도의 대외 교류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책은 2016년 저자가 쓴 《고려의 자기, 원제국과 만나다》(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 이은 고려 후기 한중 교류사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고려 후기 한반도와 원제국 간에 전개된 교역사 연구에 새로운 주춧돌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