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상을 받은 극단 적 이곤 연출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촬영 현천행. 사진 극단 적
연출상을 받은 극단 적 이곤 연출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촬영 현천행. 사진 극단 적

극단 적의 연극 〈4분 12초〉가 제44회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상 등을 받아 5관왕이 되면서 2023년 서울연극제의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었음을 입증했다.

제44회 서울연극제가 6월 20일 시상식을 끝으로 두 달여 간의 대장정을 마치면서 폐막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극단 적의 〈4분 12초〉은 우수상(작품상), 연출상(이곤 연출), 연기상(곽지숙 배우), 무대예술상(정영), 관객리뷰단 인기상을 수상, 5관왕에 올랐다.

〈4분 12초〉는 영국에서 2014년 초연 후 세계 각지에서 계속 공연되고 있는 영국의 제임스 프리츠 작품이다. 극단 적은 2021년 초연 후 제44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8편에 선정되어 지난 5월 5일부터 14일까지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공연, 연극계의 화제작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연극 '4분 12초' 공연 장면.남수현 곽지숙 배우. 촬영 포토비  사진 극단 적
연극 '4분 12초' 공연 장면.남수현 곽지숙 배우. 촬영 포토비 사진 극단 적

<4분 12초>는 위기에 처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엄마 '다이'의 오이디푸스적 성찰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디지털 성범죄의 문제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엄마의 시선으로 파헤침으로써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인지감수성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은 물론, 사회계급과 그 계급이 교육에 대해 가지는 환상과 기대, 그리고 청소년들이 받는 억압까지 함께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디지털 성폭력을 다루면서도 이 이슈를 선정적인 소재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리스극의 오이디푸스처럼 주인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이야기로까지 확장하여 크게 주목받고 있다.

연기상을 받은 '다이' 역 곽지숙 배우가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촬영 현천행. 사진 극단 적
연기상을 받은 '다이' 역 곽지숙 배우가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촬영 현천행. 사진 극단 적

이번에 연출상을 받은 <4분 12초>가 다루는 주제의식은 그동안 이곤 연출이 계속해왔던 “소외된 여성의 목소리를 무대화하는 작업”의 지향과 가치를 심화하고 확장하는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권투 경기장을 연상케 하는 사각의 링을 무대로 설정하여 장면마다 두 명의 인물이 각자의 입장을 토로하며 대립할 수 있게 연출함으로써 극의 긴장도를 높였다. 매 장면은 권투경기의 한 라운드처럼 느껴지고 관객들은 다음 라운드가 어떻게 펼쳐질지 숨죽이며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관객의 시선과 귀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게 연출함으로써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성곤 평론가는 “마치 ‘국민참여재판’을 보는 듯 했다. 관객들에게 배심원 자격을 줌으로써 당사자성을 부여했다”며 주제의식을 관객에게 깊숙이 다가가게 하는 이곤 연출의 탁월한 무대화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연극 '4분 12초' 무대. 촬영 허천행 사진 극단 적
연극 '4분 12초' 무대. 촬영 허천행 사진 극단 적

청운대 연기예술학과 교수인 이곤 연출은 그동안 “주류 연극에서 소외된 여성의 목소리”를 부각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이곤 연출이 뉴욕에서 돌아와 활동을 재개한 첫 프로젝트는 에우리피데스의 <알세스티스(2011, 2012)>로서 남편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남성중심사회에서 희생을 강요당해 온 우리 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반영했다. 이후 극단 적이 번역 초연한 <퍼디미어스(2014)>, <단편소설집(2016, 2019)>은 동시대 번역극으로서,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남성중심사회에서 소외되거나 간과되어 온 여성의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고자 제작되었다. 특히 문예창작과 교수와 제자 간의 인간적 관계, 표절과 도덕적 딜레마, 기존에 남성 간의 관계에서 진행되어왔던 세대 간의 경쟁과 성공을 위한 투쟁을 여성의 이야기로 새롭게 전환시킨 작품이다.

주인공 ‘다이’역 곽지숙 배우(극단 적)는 연기상을 수상했다. <4분 12초>는 십대의 성문제, 온라인 포르노, 도촬, 디지털 성범죄, 가족의 신뢰, 부모의 책임처럼 언뜻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주제들이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와 빠른 속도감 속에서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지문 없이 빠르게 주고받는 대사로만 이루어진 희곡을 곽지숙 배우와 남수현 배우(극단 놀땅), 성근창 배우(국립극단 시즌단원), 박수빈 배우는 뛰어난 연기력과 앙상블로 효과적으로 상황의 긴박함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2000년에 데뷔한 곽지숙 배우는 대학로에서는 인지도가 꽤 높은 배우로서 그동안 <오아시스> <햄릿의 비극> <Oil> <새들의 무덤> <9월> 등 다양한 작품에서 평단의 주목을 꾸준히 받아왔다. 특히 이곤 연출과 함께한 <햄릿의 비극>(2021년)에서는 거투르드와 오필리어, 상반되는 캐릭터를 오가며 무대를 장악함으로써 평단은 물론 관객들에게 크게 사랑받은 바 있다. <4분 12초>에서는 자식밖에 모르는 평범한 주부에서 아들(잭)의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역설적으로 아들이 가해자임을 파헤치게 되고 점점 오이디푸스적 자각에 이르는 ‘다이’의 내면을 다이내믹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 극찬을 받았다.

정영 디자이너는 무대예술상을 받았다. 이번 연극제에서 <4분 12초>가 가장 주목받은 요소 중 하나는 무대이다. 양면으로 바라보는 객석 사이로 사각의 링을 연상시키는 마름모꼴의 무대가 허공의 푸른빛 LED 사각 조명을 받으며 차갑게 존재한다. 등장인물은 4명이지만 매 장면 링(무대) 위로 등장하는 사람은 두 사람, 1:1이다. 장면마다 두 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 오르면서 치열한 공방을 펼친다. 때론 자기합리화를 때론 상대에 대한 질타를 이어가는 두 인물의 숨막히는 대결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각의 링 위에 묶어둔다. 여기에 주인공 ‘다이’의 심리에 따라 LED 조명(성미림 디자이너)의 빛깔을 다양하게 연출해내면서 무대가 극의 깊이를 더욱 심오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왔다.

정영 무대 디자이너의 탁월한 무대 콘셉트는 2021년 초연(소극장 공유)에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객석 50석의 작은 극장 무대에 차가운 LED 조명 바를 여럿 세워 다양한 공간변화를 가져옴은 물론 “디지털 시대에 보내는 조용한 묵시록”이라는 작품 슬로건에 가장 적합한 무대로 호평받은 바 있다.

<4분 12초>는 관객리뷰단이 직접 뽑는 ‘관객리뷰단 인기상’을 수상했다. <4분 12초>는 비록 번역극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의 실상,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4분 12초>가 관객리뷰단이 주는 ‘인기상’을 수상한 것은 그래서 더 고무적이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이슈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하고 가까운 이슈인지 반증하기 때문이다. 사각의 링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공방에 관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으며, 자기정당성을 주장하는 각각의 캐릭터를 연기한 네 명의 배우들에게 “경이롭다.”는 찬사를, “내가 무대에 있는 듯 숨막히는 공연이다.” “저혈압치료연극”“아들을 둔 부모라면 꼭 봐야 하는 연극”“5월 가정의 달에 가장 적합한 공연”이라는 리뷰를 쏟아냈다.

<4분 12초>는 작품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5월 5일 막을 올린 <4분 12초>는 관객과 평단이 예상했던 대로 배우들의 앙상블,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무대디자인, 인물심리를 쫒아가는 조명디자인, 관객의 심장을 쪼여들게 만드는 디지털 음악 등 각 요소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들 앙상블을 연출해낸 이곤 연출의 연출력 또한 <4분 12초>를 호평일색의 작품이 되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