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를 주제로 한 대규모 힐링 테마파크 죽녹원. 사진 강나리 기자.
대나무를 주제로 한 대규모 힐링 테마파크 죽녹원. 사진 강나리 기자.

벌써 초여름 더위가 찾아든 계절,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대나무 숲에 들어서면 서늘하고 가슴이 시원하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대숲이 있는데 특히 아름다운 대나무숲을 볼 수 있는 여행지로는 전남 담양 소쇄원과 죽녹원, 경남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 십리대숲을 꼽을 수 있다.

푸르고 마디져 올곧은 성정을 상징하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나무는 죽부인, 참빗, 대바구니처럼 우리 삶에도 깊이 녹아들었지만, 호국과 관련된 신비한 설화가 많다.

“(신라 31대) 신문왕 때 동해 가운데 홀연히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 피리)을 만들어, 이름을 만파식(萬波息)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비한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대한 기록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 K-판타지 액션 활극 ‘구미호뎐 1938’ 첫 화에서는 조선총독부에 빼앗길뻔한 조선의 보물 만파식적을 혼돈의 시대 1938년에 불시착한 이연(이동욱 분)이 되찾는 장면이 나왔다.

담양 한국대나무박물관 전시. 대나무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상징이자 예술품으로, 그리고 조선 선비의 곧은 선정을 나타내며 사랑받았다. 사진 강나리 기자.
담양 한국대나무박물관 전시. 대나무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상징이자 예술품으로, 그리고 조선 선비의 곧은 선정을 나타내며 사랑받았다. 사진 강나리 기자.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많이 알려진 신비한 피리, 만파식적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더욱 자세하다. 신문왕(재위 681~691) 임오년 5월 감은사에 머문 왕이 배를 타고 산에 가서 용에게 신비한 대나무에 대해 묻자 “대왕의 아버님(문무왕)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김유신)은 다신 천신天神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같은 마음으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보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창궐하던 질병이 낳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 올 때는 개며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도 평정해진다고 만파식적이라 불린 호국의 보물이자 예인의 악기이다. 삼국사기에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면서도 기록한 것은 당시 백성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나무 중 조릿대는 화살을 만드는 주재료였다. 한국대나무박물관 전시. 사진 강나리 기자.
대나무 중 조릿대는 화살을 만드는 주재료였다. 한국대나무박물관 전시. 사진 강나리 기자.

이보다 더 오랜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유리이사금 14년(37)에 이서고국(경북 청도군 이서면 진한 속국 중 하나)이 금성을 공격해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그때 댓잎竹葉을 귀에 꽂은 신비한 병사들이 나타나 신라를 도와 승리했다.

전투가 끝난 후 신비한 병사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미추왕의 능 앞에 수만 장의 대나무 잎이 쌓여있어 선왕의 음덕임을 알고, 미추왕릉을 ‘죽현능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의 왕들은 사후에도 조국의 안위를 염려해 나라를 지키려 했던가 보다. 이는 대나무가 화살을 만드는 주재료로 쓰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겠다.

경주 대릉원 내 미추왕릉.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으로, 대릉원 내에서 유일한 전각(숭혜전)이 세워진 왕릉이며, 고분 주인이 알려진 능이다. 미추왕은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대 왕, 삼국유사에는 제13대 왕으로 나온다. 사진 강나리 기자.
경주 대릉원 내 미추왕릉.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으로, 대릉원 내에서 유일한 전각(숭혜전)이 세워진 왕릉이며, 고분 주인이 알려진 능이다. 미추왕은 삼국사기에는 신라 제2대 왕, 삼국유사에는 제13대 왕으로 나온다. 사진 강나리 기자.

또한, 전설 속 봉황은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을 먹고 살며 오동나무에 깃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죽실은 죽미, 죽실만, 야맥, 연실 등으로도 불리는데 대나무 중 화살을 만드는 조릿대는 5년마다 열리지만, 왕대나 솜대는 60년 주기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쉽게 보기 어려운 매우 상서로운 것으로 여겼다.

지난 5월 4일부터 7일 진행된 담양 대나무축제 상징물 봉황. 전설 속 봉황은 대나무 열매, 죽실을 먹고 산다고 전한다. 사진 오소후 시인.
지난 5월 4일부터 7일 진행된 담양 대나무축제 상징물 봉황. 전설 속 봉황은 대나무 열매, 죽실을 먹고 산다고 전한다. 사진 오소후 시인.

지난 7일 끝난 담양 대나무축제의 상징이 날개를 활짝 펼친 두 마리 봉황이고, 대나무를 주제로 조성된 대규모 테마파크인 담양 죽녹원 높은 정자가 ‘봉황루’인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대나무 여행지로서 담양은 1960년대부터 80년대 전국에서 찾는 대규모 죽물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죽녹원 인근에 한국대나무박물관에서 옛 담양의 죽물시장 모습과 고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삶에서 쓰인 대나무 활용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다.

담양에서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대규모 죽물시장이 열렸다. 한국대나무박물관 앞뜰 전시물. 사진 강나리 기자.
담양에서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대규모 죽물시장이 열렸다. 한국대나무박물관 앞뜰 전시물. 사진 강나리 기자.

담양 죽녹원은 31만 ㎡ 너른 공간에 울창한 대나무 숲과 전망대와 죽림욕 산책길, 누정과 원림의 고장 담양의 대표적인 정자인 면앙정, 식영정, 명옥헌, 환벽당 등을 그대로 재현한 정자들, 쉼터, 영화‧CF촬영지, 한옥체험장 등이 마련되어 힐링과 여유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는 생태문화 공간이 있다. 또한, 육식동물로 태어났으나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는 판다를 테마로 한 아기자기한 공간도 마련되었다.

(위) 대나무 숲으로 둘러싼 소쇄원. (아래) 대나무숲 끝에 소담하면서도 멋스러운 소쇄원 광풍각을 만날 수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위) 대나무 숲으로 둘러싼 소쇄원. (아래) 대나무숲 끝에 소담하면서도 멋스러운 소쇄원 광풍각을 만날 수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반면, 자연과 조선 선비의 사유가 담긴 정원 ‘소쇄원’의 대나무 숲은 고즈넉한 멋이 살아있다.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댓잎이 파르르 떨어지는 멋을 즐기며 들어가 별서정원의 대표인 소쇄원의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에 깃든 사유를 느껴볼 수 있다.

한편, 울산 태화강 십리대숲은 장쾌하게 흐르는 폭넓은 강변을 따라 십리(약 4km)에 이르는 거대한 대나무숲으로 조성되어 보는 순간 감탄이 나올 만큼 절경이다. 이곳은 오랜 세월 자생해온 대나무로 이루어진 자연정원으로, 시원한 강바람과 댓잎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도심 안의 힐링 공간이다. 인근에 꽃양귀비, 수레국화, 청보리, 금계국 등 6천여만 송이 꽃이 바다를 이루는 최대 규모 수변초화단지가 있다.

태화강 강바람을 맞으며 댓잎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울산 태화강 십리대숲. 사진 한국관광공사.
태화강 강바람을 맞으며 댓잎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울산 태화강 십리대숲. 사진 한국관광공사.

이외에도 전남 구례 섬진강 대나무숲, 보성 대한다원 대나무숲, 거제 맹종죽 테마파크, 거제 구조라 시리대숲, 부산 아홉산숲, 그리고 영화 취화선의 촬영지인 광양 청매실 농원 왕대숲 등이 아름답다.

만일 전남 강진을 여행 중이라면 강진 읍내에 있는 영랑생가(시인 김영랑 생가)에 들러 아담한 초가 뒤편 툇마루에 앉아 편안하게 호흡을 고르고 귀를 기울이면 대나무들끼리 부딪혀 들리는 영롱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