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 세계장미축제 현장. 사진 세계장미축제 공식누리집.
전남 곡성 세계장미축제 현장. 사진 세계장미축제 공식누리집.

지금 전남 곡성은 29일까지 열리는 세계장미축제로 한창 뜨겁다. 매년 5월 세계 각국의 1,004종 수억만 송이 장미가 옛 곡성역에 조성된 기차마을을 중심으로 화사한 향연을 이루기에 인생 사진을 찍고자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인다.

곡성 세계장미축제의 중심지 기차마을의 상징물들. 사진 강나리 기자.
곡성 세계장미축제의 중심지 기차마을의 상징물들. 사진 강나리 기자.

곡성의 화려한 장미꽃들 속에서 북적이는 흥겨움을 만끽했다면 고즈넉한 여유로움과 쉼을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곡성 여행은 어떨까?

전남 곡성 입면 제월리에 있는 함허정. 조선시대 중종 때 제호 심광형이 지은 정자로 조선시대 호남 4대 정자로 꼽혔다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전남 곡성 입면 제월리에 있는 함허정. 조선시대 중종 때 제호 심광형이 지은 정자로 조선시대 호남 4대 정자로 꼽혔다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늦봄 햇살에 윤슬이 반짝이는 섬진강 물결이 제월섬을 둘러싸고 반달 모양으로 휘도는 둔덕 위에 기와를 얹은 낮은 황토담을 두른 함허정이 서 있다. 강가 모래밭 위로 불쑥 솟은 둔덕을 따라 키 큰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누정을 감싸 안고, 대나무와 야생화들이 한창이다.

굵은 참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인 함허정. 사진 강나리 기자.
굵은 참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인 함허정. 사진 강나리 기자.
섬진강 물소리를 들으며 함허정 오르는 길. 사진 강나리 기자.
섬진강 물소리를 들으며 함허정 오르는 길. 사진 강나리 기자.

물소리를 들으며 쉰두 계단을 오르면 날개를 편 새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팔작지붕 홑처마 아래로 앞면 4칸, 옆면 2칸 욕심 없이 지은 누정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굽은 모습을 그대로 살린 12개의 나무 기둥들이 지붕을 받치고, 울퉁불퉁한 자연석과 맞물려 주춧돌, 덤벙주초를 놓았다.

날개를 편 팔작지붕 아래 욕심없이 지은 함허정 정자. 사진 강나리 기자.
날개를 편 팔작지붕 아래 욕심없이 지은 함허정 정자. 사진 강나리 기자.

대나무가 무성한 산비탈을 면하고, 지붕 아래에는 하중을 견디기 위해 놓인 서까래나 모나게 만든 납도리, 도리와 장여 밑에 접시받침을 받아 장식한 소로수장도 자연을 살린 소담한 형태이다.

나뭇결 자체가 문양이 된 지붕 아래를 따라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던 조선의 명필, 창암 이삼만의 필체라는 함허정 현판(현재 걸린 현판은 복원품)과 이곳 천혜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긴 시인 묵객들의 시를 적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함허정 현판과 아름다운 함허정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편액들. 사진 강나리 기자.
함허정 현판과 아름다운 함허정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편액들. 사진 강나리 기자.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부드럽게 휘어진 낮은 담장 너머로 하현달처럼 보이는 쪽빛 섬진강 물결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새소리, 짙은 녹음을 드리운 나무를 지나는 바람 소리에 절로 긴장이 풀리고 가슴이 편안해진다. 한없이 바라보니 시간의 흐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듯하다.

함허정의 함涵은 젖다,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허虛는 비우다, 욕심이 없다는 의미이다. 섬진강 쪽빛 물결에 깊이 젖어 들어 세월을 받아들이고 욕심을 비우고자 한 정자 주인의 뜻이 아니었을까.

황토 담장 너머 반월형으로 휘도는 섬진강이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황토 담장 너머 반월형으로 휘도는 섬진강이 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독특하게 정자 사방을 둘러 물길이 나있고 담장 아래로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다. 수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곡성군청에서는 예부터 있었다고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독특하게 정자 사방을 둘러 물길이 나있고 담장 아래로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다. 수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곡성군청에서는 예부터 있었다고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정자의 주인은 조선 중종때 심광형(1510~?)이다. 청송심씨 명문가 자제인 제호 심광형은 학문이 깊고 박학다식하여 영호남에 명성을 떨쳤으나 입신양명과 권력, 부귀에 뜻을 두지 않아 벼슬을 거절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과 함께하며 선비의 삶을 살았다. 유교 이상주의자인 중종은 이를 아름다운 도리라 여겨 후학을 양성하도록 중학훈도中學訓導를 명했다.

중종 30년인 1535년 그는 전남 곡성 입면 제월리에 자신의 호를 딴 제호정을 짓고, 그중 사랑채에 ‘군지촌정사(涒池村精舍, 큰 못 마을에 학문을 가르치려고 베푼 집)’라 현판을 걸고 서당을 열어 곡성과 광양, 함평, 순창 4개 읍의 후학들을 가르쳤다.

함허정에서 50m 떨어진 제호정 고택 사랑채인 '군지촌정사', 측면에는 서석산으로 불리던 무등산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망서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함허정에서 50m 떨어진 제호정 고택 사랑채인 '군지촌정사', 측면에는 서석산으로 불리던 무등산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여 망서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가 군지촌정사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는 손자 두암 심민겸과 증손 구암 심민각이 있다. 심민겸은 의병장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나섰고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호종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모아 강화로 수송했다. 심민각은 이괄의 난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갈 때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어가를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켜 호서지방(충청도 일원)을 지켰다.

조선시대 호남 4대 정자로 불린 함허정은 심광형이 제호정을 짓고 8년 후인 중종 38년(1453), 벗과 시를 지으며 학문을 나누며 교감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제호정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절경에 지은 정자는 담양 소쇄원처럼 조선 시대 선비들이 살림을 하는 집과 떨어진 곳에 자연을 향유하기 위해 지은 별서정원과 같은 개념이라 하겠다.

함허정 앞에 휘돌아 흐르는 쪽빛 섬진강 물결 위에 반짝이는 윤슬.강물이 끊임없이 나선형으로 휘돌아 흐른다 . 사진 강나리 기자.
함허정 앞에 휘돌아 흐르는 쪽빛 섬진강 물결 위에 반짝이는 윤슬.강물이 끊임없이 나선형으로 휘돌아 흐른다 . 사진 강나리 기자.
섬진강 강변 모래밭에 핀 등갈퀴나물. 사진 강나리 기자.
섬진강 강변 모래밭에 핀 등갈퀴나물. 사진 강나리 기자.

함허정을 나서니 맞은편 제월섬으로 향하는 청둥오리떼가 한가롭다. 계절에 따라 황조롱이, 논병아리, 쇄오리, 검은등할미새 등 철새가 찾는다고 한다. 강물이 반달형으로 흐르다 보니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가다가 휘돌아 왔다가 다시 흘러간다. 일설에는 이렇게 흐르는 물결이 부귀를 가져다 준다는데 정자를 지은 심광형에게 그것이 중요하진 않았을 듯 하다. 함허정 둔덕 아래쪽에 거북바위와 용바위가 있는데 구암 심민각이 말년에 섬진강에 낚시대를 드리운 구암조대라 한다.

제호 심광형이 지은 곡성 제호정 고택의 행랑채. 행랑채 중앙이 대문이 되었다.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가를 교체해 얹는다고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제호 심광형이 지은 곡성 제호정 고택의 행랑채. 행랑채 중앙이 대문이 되었다.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가를 교체해 얹는다고 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사대부 종가인 제호정 고택은 초가지붕을 얹은 행랑채와 안채, 그리고 사랑채 3동으로 이루어져 소담하다. 하인들이 머물렀다는 행랑채는 5칸으로 중앙이 대문이 되고 양쪽에는 창고가 있다. 행랑채 오른편 우진각지붕을 얹은 사랑채에는 군지촌정사 현판 외에 측면으로 망서재望瑞齋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곳 툇마루에 서면 멀리 서석산이 불리던 무등산의 정상과 서석대, 중봉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가 갠 하늘의 맑은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 현판이 걸린 안채는 높은 뜰방돌(섬돌) 위에 一자형으로 부엌과 큰방, 대청, 툇마루와 작은방으로 된 전면4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축대처럼 높은 섬돌을 쌓을 때 처마 물받이 돌을 놓아 뜰방 아래 토사 유실을 막고, 섬돌 중앙에는 구멍을 내어 불을 때면 굴뚝 대신 이곳으로 연기가 수평으로 퍼져 마당에 깔리면서 방충, 방습의 효과를 낸다니 매우 현명한 건축방식이라 하겠다.

제호정 고택의 안채인 제월당. 제월은 선비의 맑은 성정을 뜻하는 제월광풍에서 나온 말로, 담양 소쇄원에도 제월당이 있다. 현재 24대 셋째 손부가 거처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제호정 고택의 안채인 제월당. 제월은 선비의 맑은 성정을 뜻하는 제월광풍에서 나온 말로, 담양 소쇄원에도 제월당이 있다. 현재 24대 셋째 손부가 거처한다. 사진 강나리 기자.
높은 축대처럼 쌓은 뜰방돌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굴뚝대신 연기가 마당에 깔리며 방충, 방습 효과를 냈다. 사진 강나리 기자.
높은 축대처럼 쌓은 뜰방돌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굴뚝대신 연기가 마당에 깔리며 방충, 방습 효과를 냈다. 사진 강나리 기자.

현재 이곳에는 24대 셋째 손부 김순남 씨가 살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종가를 지키는 91세 김순남 할머니는 소헌왕후(세종비), 인순왕후(명종비), 단의왕후(경종비) 3명의 왕비와 13명의 정승, 그리고 부마들을 배출한 청송심씨 가문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본가인 청송에서 소헌왕후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사를 지내려고 배를 타고 갔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파도에 떠내려갔대. 그때 자라가 묫자리를 봐주는 지관의 옷고름을 끌고 가기에 그곳에 묘를 썼다고 해. 그래서 왕비도 나오고 정승도 나오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청송읍 깎아지른 벼랑 위에는 이른 새벽 승천하던 용을 부지런한 아낙네가 보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끝내 승천하지 못한 용이 바위가 되었다는 현비암이 있고, 이 바위 뒷산 보광산에 가면 청송 심씨의 시조묘가 있다.

김완 장군이 무릎 위로 들었다는 삼각바위. 사진 강나리 기자.
김완 장군이 무릎 위로 들었다는 삼각바위. 사진 강나리 기자.

곡성 제월당 고택 군지촌정사 앞에는 김완 장군이 장가를 와서 무릎 위로 들어 올렸다는 1톤 무게의 삼각바위가 있고, 대문 밖에서 당대의 문사와 유림, 사대부들이 찾아와 말에서 내릴 때 발돋음으로 썼던 하마석, 그리고 연자방아가 있다. 또한, 마을 위쪽으로 200m 남짓 오르면 청송심씨 심선, 심광형, 심민겸, 심민각 네 분을 모신 사당, 구암사가 있다.

이곳 함허정과 제호정 고택은 곡성 시내에서 차로 15분 거리이며, 대중교통으로 오려면 이른 아침 6시경 곡성터미널에서 곧바로 오는 농어촌버스가 있다. 그러나 낮에는 곡성터미널에서 옥과터미널을 거쳐 갈아타야 하므로 1시간 반~2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서울 등지에서 곧바로 함허정을 오려면 옥과터미널로 오는 것이 빠르다.

함허정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정자이지만, 제호정 고택은 생활공간이어서 허락을 받고 입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