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 1일은 설명절이다. 고래로 우리 민족은 설명절에 다양한 세시풍속을 즐겼다. 우리 세시 풍속은 우리 겨레가 이 땅에서 살기 시작한 때부터 있어 왔다. 삼국시대에는 추석, 단오, 유두(流頭 ), 정월 대보름 등에 다양한 세시 풍속을 즐겼다. 《삼국유사》에는 그 유래와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9대 민속의 명절이 있엇다. 《고려사》에는 팔관회 와 함께 설 , 대보름 , 한식, 삼짇날, 단오, 중구일(重九日), 동지, 추석을 9 대 민속의 명절이 전한다. 

송응도, 장승업張承業, 1843∼1897 19세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송응도, 장승업張承業, 1843∼1897 19세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단오, 추석이 4대 명절이었고, 대보름, 백중, 동지, 섣달그믐 등 이 전통적인 세시 풍속으로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섣달 그믐 전날 밤에 관상감(觀象監)에서 주관하여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행사를 창경궁과 창덕궁 두 대궐 뜰에 들어가서 하였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처용놀이를 하였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섣달 그믐날에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진자(侲子)로 삼아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宮中)으로 들여보내면 관상감(觀象監)이 북과 피리를 갖추어 소리를 내고 새벽이 되면 방상시(方相氏)가 쫓아낸다. 민간에서도 또한 이 일을 모방하되 진자는 없으나 녹색 죽엽(竹葉), 붉은 형지(荊枝), 익모초(益母草) 줄기, 도동지(桃東枝)를 한데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 대문[欞戶]를 막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문 밖으로 몰아내는 흉내를 내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 한다.”

세배에 관한 내용도 있다.

“섣달 그믐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과세(過歲)라 하고, 정월 초하룻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세배(歲拜)라 하는데, 정월 초하룻날에는 모두 일을 하지 않으며, 모여서 다투어 효로(梟盧) 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즐겨논다, [......] 모든 관청은 3일에 한하여 출사하지 아니하고, 서로 친척이나 동료들 집으로 가서 명함을 던졌는데, 대가집에서는 미리 함(函)을 만들어서 이를 받았다. 근년 이래로 이 풍습이 갑자기 고쳐졌으니, 또한 세상이 변천했음을 알 수 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장유승 역해, 아카넷)에는 설명절 세시풍속을 이렇게 소개한다.

“서울 풍속에 설날 가묘(家廟)에 인사드리고 제사지내는 것을 차례(茶禮)라고 한다. 남녀 아이들은 모두 새 옷을 입는데 세장(歲粧: 설빔)이라고 한다. 친척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을 세배(歲拜)라고 한다. 제철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 하고, 술을 세주(歲奏)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설날에는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아이들은 설빔을 입는다. 또한 어른들을 찾아 세배하는 풍속도 여전하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무술년 설날(戊戌元日)이란느 시에서 세배하는 풍속을 이렇게 읊었다. “설날에 세배받는 일 모두 덜어버리니 / 正朝拜賀禮皆刪다만 노쇠한 몸 편하려 한 것 뿐이네 / 只爲殘身自要安 문 밖은 조용하여 참새 그물 칠 만한데 / 門外雀羅方可設 어찌하여 손들이 와서 서성대는가 / 如何賓客立盤桓” 세배하는 풍속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또 세배는 세알(歲謁)이라고 하였다. 목은 이색의 시 ‘즉사’(卽事)에 “문 닫고 있자니 절로 세배 오는 이 없어 / 閉戶自無新歲謁”라는 구절에 ‘세알’이 나온다. 세배 풍속이 고려시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찬은 세의(歲儀)라고도 하는데 조정에서 연로한 관원에게 지급하였다. 민간에서는 그 이전부터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설에는 떡국을 먹는다.

“멥쌀가루를 쪄서 큰 판자 위에 놓고 자루가 달린 절굿공이(떡메)로 수없이 찧고 길게 늘여서 기다란 다리 모양의 떡을 만드는데, 흰떡이라고 한다. 동전처럼 잘게 썰어서 육수에 넣고 끓인다. 소고기, 꿩고기, 고춧가를 넣어맛는 내는데, 떡국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제사를지내고 손님을 대접하니, 빠뜨릴 수 없는 세찬이다. 뜨거운 물에 넣고 끓이므로 옛날에 습면(習麪)이라고 한 것이 이것인 듯하다. 시장에서도 제철음식으로 판다. 속담에 나이 먹는 것을 두고 ‘떡국 몇 그릇 먹었다’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떡국에 관한 기록이다.

설에는 세화(歲畫)를 궁중(宮中)에 붙이고 조정에서 나눠주었다. 세화는 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다. 즉 질병이나 재난 등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고 한 해 동안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벽사(辟邪), 기복(祈福)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옛날 새해 첫날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의 하나로 이루어졌던바, 이 그림은 특히 궁중에서 재상(宰相)과 근신(近臣)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매가 토끼를 바라보는 ‘추응토박도秋應兔搏圖’는 새해를 축하하는 세화의 대표적인 화제이다. 성현의 문집 《허백당집》에는 “세화를 하사받았는데, 가을 매가 토끼를 잡는 그림이었다〔受賜歲畫所畫秋鷹搏兔〕”는 시가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3월 6일까지 개최하는 계묘년 토끼띠 해 특별전 <새해, 토끼 왔네>에 ‘추응토박도’를 볼 수 있다.

집 문에 많이 거는 데 민간에서도 이같이 했다. 《용재총화》에는 이렇게 적었다.

“이른 새벽에는 그림을 대문간과 창문에 붙이는데, 그림에는 처용(處容), 각귀(角鬼), 종규(鍾馗), 두건을 쓴 관인(僕頭官人 급제하여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던 관), 갑주를 입은 개주장군(介冑將軍), 보물을 들고 잇는 경진보부인(擎珍寶婦人) 그림, 닭 그림과 호랑이 그림 따위였다.”

종규의 형상을 그린 〈종규도(鍾馗圖)〉는 조선 시대에 새해를 기념하여 주고받던 세화(歲畫)의 주제로 애용되었다고 한다. 종규는 당나라 현종 때 사람으로 모습이 추하다는 이유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죽었다. 그의 추한 외모가 귀신을 물리친다는 전설이 생겨 후세에는 재앙을 쫓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그려 붙이는 풍습이 유행했다고 한다. 민간에서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인 것을 액운을 없앤다는 의미이다.

새해에는 덕담(德談, 잘되기는 비는 말)이 빠질 수 없다.

“잘 아는 젊은이를 만나면 ”과거 급제해라“, ”벼슬해라“ ‘아들 낳아라”, “재물 얻어라” 따위의 말로 덕담을 하며 축하한다. (逢親舊年少 以登科進官生男獲財等語, 爲德談以相賀)(《동국세시기》)

설명절을 맞아 우리나라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욱 발전하고 국민이 모두 편안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