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고구려 유적지 답사 2일차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2일차 일정은 산해관장성 성안을 탐방하고, 능원시와 건평현 경계에 있는 우하량 홍산문화유적지를 답사한 후 내몽고자치구 영성현에 위치한 요나라 중경성 터를 거쳐 적봉시 호텔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주변을 돌아보는 데, 어제 갈석산에서 보았던 무궁화를 다시 보았다. 호텔에서 본 무궁화도 역시 감흥이 남달랐다.  
조식은 호텔 내에 있는 식당에서 뷔페로 먹었다. 조식에는 콩물과 유부가 있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콩물에 유부를 넣어 먹는다고 하여 그렇게 먹어 보았다. 별미였다. 어린 시절 그렇게 드셨다고 한다. 내 어린 시절 먹었던 여름철 별미 우뭇가사리 콩국이 생각났다. 이 또한 우리네 전통음식이다. 식당에서는 청나라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직원들이 안내해 주었는데 인상적이었다.

조식 후 산해관장성 성안을 탐방했다. 행정상으로는 하북성 진황도시에 속하며, 동북 방면과의 연안 육상교통로의 관문이자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북서쪽으로는 연산산맥,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접해 있으며, 이곳에서 남쪽으로 4Km 되는 곳에 노룡두, 즉 남해구관으로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남북조시대의 북제 때 이루어진 것이다. 산해관성 동쪽에는 만리장성 동문성루에 ‘천하제일관’이라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다. 
산해관이라는 지명은 14세기 초 명대에 성을 쌓고 산해위를 설치, 군대를 주둔시킨 데서 유래되었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관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수ㆍ당대에는 임유관으로 불렸다. 산해관 장성 안은 우리나라 관광지와 비슷해 보였다. 기념품, 먹을거리, 진주조개를 파는 데도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덧 산해관성 진동문 천하제일관 광장이 눈에 들어 왔다. 넓게 자리하고 있어 그 웅장함을 더 했다. 그 광장 위로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과 누각이 그 위용을 드러내었다. 산해관성 동쪽 만리장성 동문성루에 걸려 있는 중국인들의 허장성세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화이사상을 갖고 있었다. 즉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의 기준을 만리장성으로 삼았다. 발해의 노룡두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은 산해관 각산장성과 연산산맥을 넘어 서쪽 사막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약 6,400㎞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인공 건축물이다. 문명과 비문명으로 대체되는 화이를 가르는 기준이 만리장성이었던 만큼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 밖을 관외라 불렀다. 이 관문을 들어서야 중화의 세계, 즉 문명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 때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외교사절 역시 요동을 경유하여 중국의 수도인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통과해야 했다. 조선의 사신들에게 산해관은 중국의 규모와 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특히 산해관의 관문 중 천하제일관은 그 위용이 가장 웅장하였으며, 조선 지식인들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상징적인 경계이기도 했다.

산해관성 동문성루 ‘천하제일관’. [사진=민성욱]
산해관성 동문성루 ‘천하제일관’. [사진=민성욱]

 우리는 실제로 산해관성을 목도하면서 천하제일관의 크기와 견고성에 놀라고 편액의 크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런데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은 일반적인 편액과는 다른 점 3가지가 있었다. 첫째, '第'자가 잘못 쓰여 있다. 원래 '第'자 위에는 '풀 초(艸)'자가 있는 게 아니라, '대나무 죽(竹)'자가 있어야 하는데 글자의 균형을 위해서 '풀 초'자를 썼다고 한다. 둘째, 현판에 쓴 사람의 낙관이 찍혀있지 않다. 그 이유는, 저 글씨를 쓴 사람이 명나라의 대 서예가 소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다른 글씨는 다 썼는데 '한 일(一)'자는 아무리 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음식점에 갔는데 식당 종업원이 탁자를 치운다며 걸래로 쓱 하고 한번 닦았다. 딱는 걸레질의 움직임이 자기가 찾던 '한 일(一)' 의 느낌과 같아,  한 일자로 갖다 썼다. 그래서 이 글씨는 나 혼자서 쓴 게 아니라 자기의 낙관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는, 각 글씨의 크기를 달리 했다. 그 이유는 조금 경사가 져서 건물이 조금 기울어져,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드디어 산해관성 천하제일관에 올랐다. 천하제일관에서 바라보는 서쪽인 성 안쪽과 동쪽인 바깥쪽이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이렇게 산해관과 장성을 둘러보고 중국인들의 세계관과 고조선의 영역과 문화의 경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우리 민족의 기원이자 중화문명의 기원이라고 알려진 홍산문화, 그 홍산문화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로 향했다. 이동 중에 주유소에 들렸다. 중국어로는 주유소를 加油站(가유참)이라고 하고 주유를 가유(加油)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이동시간을 감안해서 휴게소에 빵을 사서 차 안에서 먹기로 하였다. 중국은 빵 하나도 그 크기가 남달랐다. 빵으로 점심을 빵빵하게 먹고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로 이동하였다.

홍산문화 유적은 이른바 요서의 산간지대, 그 중에서도 특히 시라무렌하 유역과 대릉하, 소릉하 유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특히 요령성 건평과 조양 그리고 내몽고자치구 적봉 등이 그 중심지역에 해당한다. 홍산문화가 존속한 시기는 대개 기원전 4500년경부터 기원전 3000년경까지이다. 홍산문화는 약 1500년 가량 장시간에 걸쳐 명맥을 이어갔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적의 총량이 많지 않고 대부분의 유적은 문화층 퇴적도 두껍지 않다. 홍산문화는 그 대표적인 유적이 세 가지로 요약 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는 대형 제단, 여신을 모시는 사당인 여신묘,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홍산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이 고수한 묘제이다. 홍산문화의 적석총 발견으로 적석총의 기원을 중국 내몽고 자치구 요하 유역의 적봉 일대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시기적으로 적어도 1000년 이상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우하량 국가고고유지공원 입구에서 가까운 우하량유지박물관으로 먼저 갔으나 공사 중이라 들어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제1지점인 여신묘 보호 전시관으로 이동하였다. 여신 두상이 나왔다고 하는 곳에다 전시관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우하량 유적군 전체의 북쪽 중앙부에 해당하며, 해발 680m로 여러 유적 중 가장 높다. 여신묘 내부에서 인물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인물상은 이미 파편으로 흩어진 채 발견되었다. 인물상 파편 가운데 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얼굴, 다리, 어깨, 유방, 손, 안구 등이 있으며, 대체로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이곳을 여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에서 여신묘라고 부른다.

우하량 유적지 제2지점 보호전시관.  원형 제단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민성욱 ]
우하량 유적지 제2지점 보호전시관. 원형 제단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민성욱 ]

우하량 유적은 총 11개 지점에서 묘장을 동반한 적석유구가 발견되었고, 제2지점, 제3지점, 제5지점, 제13지점, 제16지점 등 다섯 지점이 정식으로 발굴되었다. 다만 제13지점에서는 묘장이 발견되지 않아 제단으로 간주되었다.
여신묘를 둘러보고 제2지점으로 이동하였다. 제2지점은 적석총이 무더기로 발굴된 곳으로 적석총 보호전시관이다.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돔형 건물 형태로 되어 있었다. 적석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조되었다. 적석총의 지상부분은 대개 규질의 석회암을 쌓아 만든 백색의 석조 구조물이다. 그 외면은 가공된 석재로 반듯하게 축조되었으며, 외면의 경계선을 따라 원통형태의 통형기가 가지런히 매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통형기는 일본의 전방후원분에 매설되어 있는 원형토기 하니와(植輪)와 비슷한 형태로 무덤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석총의 평면 형태는 직사각형, 원형 또는 전방후원형 등으로 다양하며, 외관은 다층의 피라미드형이다. 특이한 것은 적석총 사이로 중앙에 원형 형태의 제단이 보인다. 3단 형태의 타원인데, 각도가 동남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15도 기울어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양이 황도를 따라 15도 움직일 때마다 절기를 만들어 일 년이면 총 24개의 절기가 된다. 황도는 태양이 1년간 움직이는 길이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와 각도에 따라 계절이 바뀌고 기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제단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천문관측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하량 제13지점은 금자탑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제단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발굴 진행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닫혀 진 철문 사이로 바라보아야 했다.

이상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를 종합적으로 살펴 본 결과, 일반적으로 홍산문화 적석총은 취락 배후의 산지에 조성되었는데, 우하량 유적군 일대에서는 아직까지 이 유적군의 규모에 상응하는 취락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우하량 유적지는 전문적으로 매장과 제의를 위해 마련된 장소로 볼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하량 유적군은 홍산문화 권역에서 널리 관찰되는 적석총이 대형화되고 때때로 제의를 위한 시설이 추가된 유적들이 일정한 공간 범위에 집중된 복합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하량 유적지를 출발하여 내몽고자치구 영성현에 있는 요나라 중경성 터로 이동하였다. 내몽고자치구에 들어서자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시내의 각 간판마다 중국 한자 외에 몽고어가 추가로 병기되어 있었다.
한참을 달려 영성현 요 중경성 터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요중경유지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그 표지석 너머로 대형 전탑이 보였다. 팔각 형태의 13층 불탑이었다. 그 크기가 웅장하여 수 Km 밖에서도 보일 것 같았다. 불교에서 13이라는 숫자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위대한 포용의 숫자이다. 평면적 상징의 8방에다 하늘과 땅을 더하면 10방 세계로 온 우주를 상징한다.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세상인 삼세를 더하면 1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즉 13이란 시방삼세를 의미한다. 이처럼 숫자 13의 의미는 불교에서는 우주의 상징 외에도 매우 중요한 법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불탑의 층수에도 당연히 적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탑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황하하류에 퇴적된 모래가 많아 그것을 활용하기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탑은 당시 이정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 13층 불탑으로 25~30층 정도의 높이로 90미터에 해당되는 듯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는 황하 흙으로 빚은 벽돌로 만든 전탑, 한국은 화강암이 많아 석탑, 일본은 나무가 많아 목탑이 주류를 이루었다.

요 중경성 유지에 있는  팔각 13층 전탑. [사진=민성욱]
요 중경성 유지에 있는 팔각 13층 전탑. [사진=민성욱]

  요나라 중경성 터에 있는 전탑을 보고자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 언덕 위에서 눈높이를 달리하니 탑이 달리 보였다. 이곳은 중국학자들이 요 중경이라고 명명하고 표지석을 세워 놓았을 뿐, 요나라 중경이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커다란 옛 성터가 있는 이곳은 거란(요)의 중심지가 아니고 고조선의 옛 지역으로 고조선의 뒤를 이은 고구려 혹은 발해의 유적으로 보기도 한다. 

탑을 보고 다시 정문 쪽으로 내려오는데,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조금 걷다가 보니 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거미줄에 걸려 있는 잠자리를 구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또 다른 한 분이 잠자리가 편해야 된다고 하셔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요 중경성 터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안내해 주신 분이 노지 수박 1개를 사서 나누어 주었는데, 수박 맛이 좋았다. 수박 맛보다 더 대박이었던 것은 가격이었다. 수박 1개 가격이 8위안으로 한화로 약 1,300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제 2일차 숙소인 적봉시 新泰和宾館(신태화빈관)으로 향했다.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들은 얘기인데 중국에서 외국인들은 5성급 호텔에서 자야 된다고 한다. 외국인이 낮은 등급의 호텔에서 자면 그 호텔 직원이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되어 있고, 신고하면 중국 공안(경찰)이 나와서 숙소를 옮기게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보안 차원에서 외국인을 등록하는 시스템이 큰 호텔에만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어쩌면 관광수입을 올리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장삿속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