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성공원의 전경이다. 일제의 잔재인 향나무가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달성공원에 오기 전에 이런 기사를 읽었다.

“대구사람이면 일생에 3번(자신과 아들, 손자가 유치원 다닐 때)은 달성공원에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민들에게 사랑 받는 공간이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처럼 동물원이 있고 산책할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올해 개통한 도시철도형 모노레일 3호선으로도 쉽게 갈 수 있는 대구의 중심이다. 공원에 가보니 가족과 연인들이 사자와 코끼리, 원숭이들을 구경했다. 어르신들은 의자에 앉아서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여느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잘 가꿔진 정원수와 동물들이 달성토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오게 됐을까? 
 
대구를 짓밟은 일본신사
 
▲ 달성공원 산책길(사진=윤한주 기자)
 
1905년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식민국가로 전락한다. 이듬해 11월 3일 달성에 일본인들은 황대신전 요배전을 건립한다. 당시 경상감영은 이곳에 부민들을 위한 뽕밭이나 미나리꽝 재배지로 조성해야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러나 대구역을 건립하면서 건축과 토목에 대한 주도권을 쥔 일본거류민회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경상관찰사가 손을 들고 만다. 거류민단은 달성공원 기성회를 조직해 복권사업으로 벌어들인 돈과 조선인과 일본인 유지들이 낸 현금으로 신사의 기초공사를 마친다. 당시 1만원으로 가이즈카향나무, 단풍나무, 앵두나무, 소나무 등 관상수 6만 그루 정도를 심었다. 
 
특히 달성공원 향나무의 대다수가 가이즈카향나무라는 점이다. 일본에서 들여온 원예종으로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는다. 일본의 식민지 개척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할 수 있겠다.
 
1910년 직후 일본인거류민단은 다시 요배전의 개축에 착수했다. 1914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을 기해 대구 신사의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1920년 일본인들은 대구신사를 확대 개축하기로 한 것. 대구시장을 회장으로 하는 대구신사종영봉사회를 조직했다. 조선인에게 강제로 모금하도록 했다. 이때 신사의 제신은 소위 천조황대신이었다. 경내 규모는 5,658평, 건물 수는 9채 규모에 달했다.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민의 정신마저 영원히 빼앗기 위한 일제의 상징으로 우뚝 선다. 
 
달성토성의 공원화가 남긴 비극
 
▲ 달성공원 내 코끼리(사진=윤한주 기자)
 
그렇다면 동물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일본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배경과 관련이 있을까? 실제 일제는 1909년 창경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1911년에는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1970년에 개장한 대구 달성공원의 동물원은 일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이은)의 아들 이구(李玖)가 설계한 것이다.
 
그는 한미합작설계용역 회사의 회장으로 동물원 건축물 설계를 맡았고 공원에 대한 기본조성계획은 경북대 조경학과 임순무 교수가 설립했다.
 
달성의 전체적인 조경은 가운데 평탄하게 조성된 둥근 광장과 주변 기슭 안쪽으로 동물 우리를 배치하는 것 말고는 일제시대 모습 그대로였다. 일본인들이 심은 나무도 그대로 이어졌다. 달성공원 중앙의 원형광장을 보면 일본 동경의 우에노공원과 거의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 달성공원 내 사자(사진=윤한주 기자)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곳에 일본과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맹활약했던 왕산 허위 (許蔿,1854~1908)는 국가유공자 1호다.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또 안동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1932) 애국지사가 있다. 
 
이에 대해 변성호 대구 향토역사관 학예연구사는 “1950년대 대구의 인구가 급격하게 불어나면서 대구의 기념비를 지을만한 곳이 달성공원밖에 없었다”라며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는 중구청과 대구여고가 있었고 경상감영공원은 경상북도청이 있던 자리다. 그래서 이곳으로 기념비가 들어온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왼쪽부터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과 이상룡 선생의 동상이다. 일제의 신사가 있던 자리에 독립운동가의 상을 조성한 것이다(사진=윤한주 기자)
 
한편 대구신사는 광복 이후도 철거되지 않았다. 대신 1946년 대구의 유지들이 공원 내 국조숭배를 이유로 단군성전을 계획했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 신사건물을 단군성전으로 개수하자는 것이었고 헌금운동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구시는 1966년 광복절을 앞두고 단군성전을 철거한다. 성전은 대구 수성구 법이산으로 이전됐다. 일제의 잔재는 그대로 놔두고 국조만 내쫓은 셈이 됐다. 다음 편에서 단군성전을 만나본다.(계속)
 
 
■ 달성공원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35(달성동) (바로가기 클릭)
문의: 053-554-7909
 
■ 참고문헌
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 新 택리지, 거리문화시민연대 2007년
한국일보, "이번 역은 달성공원역이라 예~~" 구수한 안내 방송, 2015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