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147호로 지정한 울산 천전리 암각화(제공=울산암각화박물관)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에서 2km 떨어진 곳에 천전리 암각화가 있다. 1970년 문명대 동국대 교수가 발견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보 제147호이다. 두 암각화의 공통점은 역시 성스러운 제단이었다는 점.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암각화 주변에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너른 터가 있고 하천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문양에 있다.

반국대암각화는 묘사력이 으뜸이다. 모두 쪼기 기법으로 조각된 바다짐승과 선 쪼기기법으로 조각된 육지동물의 특징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대상물의 특징을 단순화 혹은 강조하거나 과장된 면이 있어 표현주의 양식에 가깝다고 한다.
 
반면 천전리 암각화는 일부 동물 문양과 신라시대 명문, 선각 그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조각이 기하학적 문양이다. 문양은 암면을 상하로 크게 이등분했을 때 주로 상단부에 있다. 종류로는 원문, 동심원문, 소용돌이문, 마름모꼴문, 물결과 직선 등이며 여성의 표식도 새겨져 있다. 이러한 묘사는 개념화된 사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하학적 미술양식이며, 인간의 사유를 기초화한 문자이자 추상주의 양식의 미술이다.
 
그렇다면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신석기부터 청동기시대까지 다양한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문 교수는 고조선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전후라고 한다면 고조선의 후국에 속한 진한이 한강 이남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진한의 중심세력인 한 부족이 천전리 암각화를 새겼다는 것이다.
 
특히 천전리 암각화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을 고조선의 문자로 해석한 점이 주목된다. 기호들이 여러 번 다양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을 볼 때 이는 메시지를 전하는 문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근거로는 태양을 상징하는 동심원인 겹둥근 무늬에 있다. 암각화에는 겹둥근 무늬가 10여 개가 있는데 가장 크고 뚜렷한 태양문이 중심부에 있다. 문 교수는 “태양숭배의 중심으로 볼 수 있다”라며 “대표적인 태양숭배족인 한 부족이 태양숭배의 제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뿐인가? 신라시대 화랑(花郞)들이 이곳에서 심신수련을 했다는 흔적도 있다. 천전리 계곡은 신라 왕족이 즐겨 찾았던 명소였다. 신라 말까지 왕족, 승려, 화랑 등이 암각화에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옆에는 화랑들의 군사 연병장이 있다고 한다.
 
화랑이라고 하면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처럼 군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 등과의 많은 전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신을 닦고 제사를 올리고 향가를 짓는 등 선도(仙道) 수행자였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화랑의 기원에 대해 행촌 이암(1297∼1364)은 단군세기(檀君世記)에서 고조선을 통치한 13대 흘달 단군으로 보고 있다. 흘달 20년에 미혼 자제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여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고 하고 그들의 행색을 두고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조의선인(早衣仙人)으로 신라는 진흥황 때 화랑도로 계승됐다.
 
천전리 암각화와 화랑의 만남은 마치 강화도 참성단 옆에 청소년수련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를 되살린다면 한민족의 시원을 만나고 화랑의 정신(Spirit)도 계승할 수 있지 않을까?(계속)
 
■ 참고문헌
 
강삼혜, 천전리 암각화의 기하학적 문양과 선사미술, 강좌 미술사 제36호, 한국미술사연구소 2011년
문명대, 한국조각사, 열화당 1980년
문명대, 천전리 암각화의 발견의미와 도상해석, 한국미술사연구소 21회 학술대회,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