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유일의 한글학자를 기념한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최현배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고 2010년에 지은 것이다.(사진=울산 중구 외솔최현배기념관 제공)

광복 70년을 맞은 올해 ‘외솔 최현배 선생기념관’을 찾은 감회는 남달랐다. 최현배(1894~1970)는 울산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다. 그는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강조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기에 한글을 목숨처럼 지켜낸 그의 정신을 만나보자.

애국의 고장
 
기념관은 선생이 1894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옛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나 자란 생가를 복원하고 2010년에 지은 것이다. 울산시와 중구는 2003년부터 47억 원을 들였다고 밝혔다. 기념관은 3,316m²(약 1004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총면적 852m²·약 258평)로 건립됐다. 지하 1층에는 전시관과 영상실, 한글교실, 체험실 등이 갖춰져 있다. 지상 1층은 생가와 조형물이 있다. 한글학자를 주제로 한 전국 유일의 한글박물관이다.
 
▲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 1층 전시관이다. 최현배의 저서와 친필원고, 지팡이, 옷, 한글타자기 등의 유품을 만날 수가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 건물도 주변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도록 디자인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주민과 함께 다양한 교육, 문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 지역은 울산 3.1 운동 순국열사 위패를 모신 삼일사, 병사를 양성하던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 울산 3.1운동 본거지인 병영초등학교, 병마절도사 공덕비가 있는 병영1동 주민센터 등이 있다. 애국의 고장이라고 하겠다. 
 
박성민 중구청장은 “외솔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한글 연구와 보급에 평생을 바친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며 그 뜻을 후세에 전승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지역의 향토문화 계승을 통해 주민들의 애국 애향심을 고취하고자 건립했다”라고 말했다.
 
김성회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1층 전시관부터 둘러봤다. 최현배의 어린시절 사진과 성적표가 눈에 띈다. 99점을 받았다는 성적표를 가리키면서 관비유학생으로 다녀올 만큼의 수재였다고 한다. 
 
▲ 최현배 선생은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강조했다.(사진=윤한주 기자)
 
그는 1910년 4월 관립 한성고등학교(식민지 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명)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단 한 명의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1915년 4월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여 우리말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한글>지 창간과 ‘한글날’ 제정에 참여했다. 이후 1929년에는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표준어 사전,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최현배의 한글 관련 저서들이다.(사진=윤한주 기자)
 
전시관엔 '나라사랑의 길', '우리말 큰사전', '조선민족갱생의 도' 등의 저서와 친필원고, 지팡이, 옷, 한글타자기 등의 유품을 두루 만날 수가 있다.
 
전시관 코너를 돌면 선생이 방에서 책을 보는 모습과 일제에 의해 3년간 감옥살이를 하는 상황이 재현된 밀랍 인형이 있다. 실물처럼 앉아있는 선생의 모습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살고 있지만 한글은 반드시 지켜서 후손들에게 전하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목숨과도 같은 한글지키기
 
▲ 최현배 선생이 감옥살이를 하는 상황이 재현된 밀랍 인형(사진=윤한주 기자)
 
선생은 두 번의 옥고를 치렀다. 1938년 9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되어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선생을 연희전문에서 강제로 퇴직시켰다. 1941년 5월 복직하긴 했지만 교수가 아니라 도서관의 촉탁 사원이었다. 이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됐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체포되어 4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특히 ‘한글이 목숨’이라고 쓴 선생의 친필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1932년으로 추정합니다. 선생님이 어느 식당의 방명록에 ‘한글이 목숨이다’고 쓴 거에요. 러시아어, 중국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가 있지만 선생님은 한글을 꼭 지켜야한다는 것에 심취해서 식당 방명록에까지 쓴 것이라고 봅니다.”
 
이 글은 1932년 서울의 한 음식점 주인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방명록 '금서집(錦書集)'에 쓴 붓글씨 한 장이다. 금서집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5년 동안 한 음식점 주인이 받은 80쪽 문집이다. 
 
▲ 한글은 목숨이라고 쓴 최현배의 친필원고(사진=윤한주 기자)
 
전시관에는 타자기도 있다. 선생의 의견으로 정음사에서 만든 외솔이란 브랜드의 타자기라고 한다.
 
“(선생님은)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가 나는 것처럼 타자기 소리가 난다면 우리도 빨리 글을 깨칠 수 있을까? 그래서 타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거에요.”
 
선생이 추진한 한글의 기계화 이후 컴퓨터로 이어지고 IT강국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가 아니겠느냐는 설명이다. 한편으로 선생이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이른 기간에 낮은 문맹률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도 들었다. 그의 삶이 곧 한글의 역사이고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다. 
 
기념관 관계자는 “연간 3만 명 이상 방문하고 한글날을 앞둔 9월과 10월에 찾는 이가 많다”고 말했다. 다음 편에서는 최현배의 스승인 주시경과 나철을 통해 한글운동의 뿌리인 단군과 홍익정신을 만나본다.(계속)
 
■ 외솔 최현배 기념관 
 
매주 월요일 휴관, 09시부터 18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가 있다.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12길 15, 찾아가는 방법(바로가기 클릭)
 
문의) 052-290-4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