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충의사에서 바라본 숲이 학성공원이다. 일본왜성의 터(사진=윤한주 기자)

울산의 중심가에 자리한 학성공원. 이곳은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고 하여 학성(鶴城)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따뜻한 햇볕이 나무 사이로 비치는 가운데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이 400년 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맞은편 충의사(忠義祠)가 당시의 역사를 기리고 있었다. 1592년 제1차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동래성을 혁파하고 울산을 점령한다. 그러자 이 지역의 의병들이 왜군을 격파한다. 1597년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에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현재의 자리에 성을 쌓고 버티었다. 당시의 성곽이 공원에 남아있다. 이곳을 울산왜성이라고 불렀던 이유다. 

50m 정도의 야트막한 높이에 불과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울산 시내가 보인다. 이곳이 공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13년 김홍조(金弘祚, 1868~1922)가 주변 7천 평의 땅을 사들여서 조성하고 나서다.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심은 공원은 1928년 울산에 기증했다. 그는 부산에서 사업을 일으켜 거부가 되고 경남일보를 창간해서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박상진 의사의 대한광복단을 지원했다. 특히 안희제가 운영한 백산상회에도 참여했고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이 된다. 안희제는 부산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로 그의 손자를 인터뷰해서 보도한 바 있다.(바로가기 클릭)
 
1922년 7월 20일 별세하기 전까지 지역의 유지로서 장학사업을 전개하고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그의 정신은 역사자료에서 찾아야 하지만 공원을 기증한 덕분에 시민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다. 
 
▲ 조일전쟁에서 순국한 울산 의사 227위와 이름 없이 조국을 구하고 순절한 무명제공신위(사진=윤한주 기자)
 
공원에서 충의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보면 충의사가 보이는데 막상 골목길로 접어들자 방향을 찾지 못했다. 표지판이 익숙하지 않은 초행자는 시민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1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사당은 2000년에 건립했으니, 오래된 건물은 아니었다. 이곳에는 울산 의사 239위와 이름 없이 조국을 구하고 순절한 무명제공신위(無名諸公神位)를 함께 봉안했다.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이들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충의사가 있는 학성산 구릉에서 울산왜성을 바라보기를 권한다. 적국에게 빼앗긴 조국의 성을 되찾으려고 관군과 의병이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는 2001년에 건립한 임진왜란전시관의 그림과 유물로도 만날 수가 있다. 
 
사당에서 향을 피우고 참배를 올렸다. 위패들만 있는 이곳에서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기려본다. 그들은 단군의 땅에서 후손의 미래를 위해 싸웠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조국을 구한 정신은 후손의 DNA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으리라. 그것을 다시 깨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역사교육이 아닐까? 
 
▲ 충의사 임진왜란전시관의 울산 도산성 전투 모형과 지도(사진=윤한주 기자)
 
조일전쟁 이후 울산에 많은 애국자가 태어난다. 이 가운데 “한글은 목숨이다”고 외친 외솔 최현배(1894~1970)를 찾기로 했다. 그는 우리민족이 쓰는 말을 배달말이라고 했다. 배달(倍達)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대 한국을 가리킨다. 김교헌은 <신단실기>에서 단군이 세운 국가 즉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최현배는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배달겨레의 나라를 뜻하는 한배나라야말로 오직 내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한배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주장했다. 그의 한글사랑과 애국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외솔최현배기념관'은 충의사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30분 거리에 있었다.(계속)
 
■ 울산 학성공원
울산 중구 학성공원3길 54 (바로가기 클릭)

■ 울산 충의사
울산 중구 서원11길25 (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