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면 볼거리와 먹을거리부터 찾는다. 오감(五感)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역사기행은 다르다. 숨겨진 가치를 찾아야 한다. 앞서 소개한 울산의 국보 대곡리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에서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바위에 새긴 고대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예술가요, 성직자였다. 고래, 사슴 등 동물뿐만이 아니라 제사장 그림부터 태양을 상징하는 기하학적 문양까지. 지금도 수많은 학자가 암각화에 매달려서 연구하도록 만드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울산시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니, 또 한 번의 쾌거를 기대해본다.

울산의 대표적인 유적을 만났으니, 이제는 인물 차례다. 누구일까? 바로 영해박씨의 시조이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 363∼419)이다. 그의 유적이 울주군에 있다. 울산광역시기념물 1호인 치산서원(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30-2), 망부석(두동면 만화리 산1), 은을암(범서읍 척과리 산152) 등이 그것이다.
 
물론 박제상의 출신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박제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갈문왕인 아도, 아버지는 파진찬인 물품, 관등은 내마, 벼슬은 삽량주간이었다고 한다. 삽량(揷梁)은 오늘날의 양산을 말한다. 따라서 벼슬살이를 근거로 박제상을 양산의 인물일 수 있지만 출신지와는 별개로 보기도 한다.
 
▲ 왼쪽부터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제공=박제상기념관)
 
박제상과 가족의 이야기는 문화유산으로
 
그렇다면 울산의 박제상 유적은 무엇인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박제상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기리고 있다는 점이다.
 
치산서원은 영해박씨 문중이 신모사(神母祠)라는 이름으로 박제상과 부인 김 씨 그리고 두 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1868년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에 따라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한 것이다. 
 
망부석(望夫石)은 박제상을 그리워하던 부인이 죽어서 돌로 변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바위(7m)다. 치술령 정상에서 200∼300m 못 미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글자는 1980년에 울산향토사 연구회가 새긴 것이다. 
 
치술령은 높이가 765.4m의 산으로 동해가 내려다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일본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뛰어나다. 1987년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팀은 치술령 정사에 신모사가 있었던 터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신라 토기와 기와편이 수습되는 등 사당의 울타리 터가 남아있었고 사당의 규모는 택지를 볼 때 10m x 11m 정도에 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울주군은 1997년 7월에 신모사지(神母詞址) 기념비를 세웠다.
 
은을암(隱乙岩)은 <울산읍지>에 따르면 “은을암이 망부석 동쪽 10리에 있으며 박제상 부인의 혼이 새가 되어 남아서 암혈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암혈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암혈은 넓이가 1.25m 높이가 1.8m, 깊이가 8m의 동굴로 되어 있다. 구전에 따르면 박제상의 부인이 죽고 나서 치술신모로 받들어졌다고 한다.
 
이어 2008년 9월에는 충렬공 박제상기념관이 개관되기에 이른다. 치산서원 인근 9,461㎡ 부지에 총 6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박제상과 가족의 이야기를 밀랍인형과 도표, 영상으로 꾸몄고 문화관에는 박제상이 살던 신라 시대상과 울주의 민속 등을 모형으로 전시했다. 야외에는 박제상 추모비와 부인 김 씨와 딸을 기리는 삼모녀상, 효열비 등이 조성됐다. 울주문화원은 2010년부터 이곳에서 충렬공 박제상 문화제를 열고 있다.
 
▲ 박제상기념관은 2008년 치산서원 인근에 개원했다.(제공=박제상기념관)
 
만고충신(萬古忠臣)의 비밀
 
신라의 박제상이 충신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와 <삼국사기> 에서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름이 다르다. 김부식은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아들을 구해온 이를 박제상이라고 한 반면, 일연은 김제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용은 비슷하다. 대표적인 기록을 살펴보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외국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과 자식을 그리워한다. 
 
이때 신하들은 삽라군(歃羅郡)의 태수로 있던 박제상을 추천한다. 이에 대해 박제상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로,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서 죽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어렵고 쉬운 것을 따진 뒤에 행한다면 충성이 아니고, 죽고 사는 것을 헤아린 뒤에 움직인다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비록 못났지만 원하옵건대 명을 받들어 행하겠사옵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힌 왕의 동생을 구해오고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가족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배에 오르는 그를 보면서 아내가 통곡한다. 남편인 박제상의 말이다.
 
“내가 명을 받들어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당신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이미 죽음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일본에서 같이 도망가자는 왕의 아들에게 혼자서 추격을 막겠다고 밝혔다.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뿐인가? 살려주겠다는 일본 왕 앞에서 그 유명한 어록을 남긴다.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매질을 당할지언정 왜국의 벼슬을 받지는 않겠다.”
 
결국 박제상은 순국한다. 왕은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하며 박제상에게는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 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다. 박제상은 충신 중의 충신이 아닐 수가 없다. 훗날 백범 김구는 박제상의 죽음에 대해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는 신조로 평가했다. 그도 충성을 다짐한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성스런 박제상 이야기에 대해 반론도 적지 않다. 
 
고운기 한양대 교수는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전범을 만들고자 했던 김부식의 관점에서 (전형적인 충신) 박제상은 너무나 훌륭한 소재”라며 “삼국사기에 박제상을 열전에 넣어 소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녕호 경북대 교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중세 이후 형성되었다. 중세는 박제상이 생존했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충을 통치이념으로 강조하던 시대다. 문헌 기록에 그를 충신의 전범으로 본 시각은 중세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다음 편에서 마고부터 환인, 환웅, 단군 등 한민족의 창세기 <부도지>를 전한 박제상의 이야기를 만나본다.(계속)
 
 
■ 참고문헌
 
김구 지음, 도진순 엮음, 백범일지, 돌배게1997년
고운기, 인물한국사, 목숨을 바쳐 왕자를 구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 네이버(바로가기 클릭)
권녕호, 박제상 전승의 양상과 의미, 한국어문학회 2002년
울주문화원, 울주천년 인물을 만나다,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