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기념관 입구이다. 지하에 내려가면 전시관을 볼 수가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백산기념관은 부산역에서 멀지 않았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인 중앙역에 내리면 된다. 5분이면 닿을 거리다. 아침 10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9시부터 개장하는 부산근대역사관부터 들렸다. 이곳은 1920년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됐고 해방 후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시민들의 반환요구로 문화원은 철수되고 2003년에 부산근대역사관이 조성됐다. 200여 점의 영상물과 전시물이 부산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도록 잘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독립운동 관련 코너는 한 개에 불과했다. 

대부분 일제가 조선을 어떻게 침탈했는지 상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이 건물이 침략의 상징이었던 만큼 시민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육의 공간’이라는 역사관의 취지에 들어맞았다. 일본 관광객이 오면 가장 좋아할 것 같았다. 조선을 침탈하고 식민한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의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역사관을 나왔다. 이렇게 수난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역사관이 우리나라에 한 곳뿐이겠는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대일항쟁기라고 강조해도 선조의 역사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피해자로 보는 관점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반면 백산기념관은 항일독립운동 자금의 본산이 아니겠는가? 일말의 기대를 안고 모텔과 음식점이 늘어선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런데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 1995년 옛 백산상회 자리에 만든 기념관은 부산근현대전시관에 비하면 작았다. 지상도 아닌 지하에 자리한 기념관에는 백산 안희제의 유품과 독립운동 자료 8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원 봉사하는 노인이 앉아있었다. 
 
백산 안희제와 임시정부
 
전시관을 둘러보는 데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별로 볼 것이 없다”라고 가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 백산기념관 관계자의 말이다. 하지만 백산 안희제의 애국정신은 유품 곳곳에 서려 있었다. 그 정신을 전하는 것은 전시관의 규모가 아니라 사람이다.
 
부산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고(故) 이종률 교수(1910∼1989)는 응시생들에게 “백산에 관해 아는 것을 이야기하라”라고 물어 대답이 시원찮으면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백산 안희제(1885∼1943)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상상회를 부산에 세우고 국내외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대동청년단과 같은 비밀조직을 운영했다. 당시 신교육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영남지역 신교육운동에도 앞장서나갔다. 동래 구포의 구명학교, 의령의 의신학교와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또 언론활동으로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당시 부산지국을 운영했고 1927년 월간 잡지 자력을 발행했다. 1928년 6월부터 1931년 10월에는 중외일보 경영에 참여하다가 사장을 맡기도 했다.
 
특히 백산무역주식회사는 1914년 안희제, 최준, 윤현태 등 수십 명의 주주가 설립한 무역중개사이다.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위탁 판매했다. 1928년 1월에 파산했다. 
 
▲ 옛 백상상회(제공=독립기념관)
 
권대웅 대경대 교수는 “1921년부터 자금난과 결손을 거듭한 것은 경영의 부실이라기보다는 독립운동자금을 회사의 수지와 관계없이 계속 공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 백산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다는 증언이 백범 김구에게서 나왔다.
 
“해방 후 백범이 최준(경주 최부자집)을 경교장으로 초청, 그가 받은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꺼내 보여주었을 때 최준이 그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안희제의 묘소를 향해 통곡했다. 최준의 독립운동지원금 명세서와 백범의 독립운동 자금 장부가 한 푼의 차이도 없이 그대로 임시정부에 전달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이 있기까지 독립운동 자금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라며 “가령 독립군의 경우 전투사도 중요하지만 수만 명에 달한 독립군의 무기나 식량이 어떻게 공급될 수 있었던가를 규명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산은 겉으로 드러난 독립운동보다는 독립운동의 내면을 살필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독립운동가였다”라고 평가했다.
 
단군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백산은 해방을 앞둔 1943년 9월 2일에 순국했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지도자로서의 순교(殉敎)이기도 하다.
 
홍암 나철(1863∼1916)은 1909년 1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단군교를 중광한다. 이듬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구국활동에 나선다. 백산은 1911년에 입교한 것으로 나온다. 본격적인 활동은 국내의 활동이 어려워지고 1933년 중국으로 명명한 이후다. 국외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서 발해농장을 경영한다. 이듬해 대종교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온다. 백산은 대종교 서적간행을 맡는다. 교적 간행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성금을 냈고 여러 교우에게서도 성금을 모았다. 1940년 <홍범규제> 5백 부, <삼일신고> 2천 부, <신단실기> 1천부 등 6종 1만 5백 부를 만주 연길현에서 출판했다. 
 
▲ 백산 안희제 흉상과 전시관(사진=윤한주 기자)
 
특히 발해고궁지에 단군전인 천진전 건립을 추진했다. 1942년 10월 천진전건축주비회(籌備會) 총무부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10월 3일 동경성에서 개천절 경축식을 거행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천진전을 이곳에 세움으로 대종교와 단군민족주의의 구심점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일제는 밀정을 통해 감시하다가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11월 19일 만주에서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일으켰다. 두 사건은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널리 펴는 말’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편지는 대종교의 총본사에서 포교활동과 인재양성을 해 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널리 펴는 말을 조선독립선언서로 조작하고 글 가운데 ‘일어서라’를 ‘봉기하자’로, ‘움직이라’를 ‘폭동하자’라고 바꿨다. 이 문서를 구실로 윤세복, 안희제를 포함한 대종교 간부 2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했다. 백산은 1942년 11월 5일 고향에서 피검, 목단강성에서 9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병보석으로 출감됐으나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대종교에서는 백산을 순국십현 또는 임오십현이라고 부른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다음 편에서 백산의 손자 안경하 광복회 부산광역시 지부장을 만나본다.(계속)
 
■ 참고문헌
 
이동언, 독립운동 자금의 젓줄 안희제, 역사공간 2010년
백산안희제선생순국70주년추모위원회, 백산 안희제의 생애와 민족운동, 선인 2013년
 
■ 백산기념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3가 10-2 (바로가기 클릭)
전화번호 051-600-4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