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전기의 문신, 변계량(사진=밀양시청)

경상남도 밀양에서 천제를 지낸 터는 찾을 수 없었으나, 천제를 올리자고 말한 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다. 그는 본관이 밀양으로 1382년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었고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1417년 대제학에 임명되면서 10년 동안 외교문서를 맡아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런데 태종 16년 가뭄이 심해지자 변계량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는 상소를 냈다.

당시 조선은 천제를 지낼 수가 없었다.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 지내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 지낸다”라는 예(禮)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파격이었다. 먼저 상소(上訴)문을 살펴보자.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그는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천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되었다”라며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결국 임금은 그에게 제문을 짓게 했다. 이어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를 드리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라고 실록은 전했다.

▲ 변계량비각(卞季良碑閣),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에 있다(사진=밀양시청)

천제를 올리자는 그의 주장은 예법이 아니라 당대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가 내려서 백성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게 됐으니, 그의 행동은 단군이 가르침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따랐다고 볼 수 있겠다.

현재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에 변 씨 3부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고려 말에 판서(判書)를 지낸 변옥란과 그의 두 아들 춘당(春堂) 변중량, 춘정(春亭) 변계량의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가 그것이다. 1946년 후손들이 건립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최초로 천제를 주장한 그를 국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단군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조선 후기에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단군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이다. 현재 밀양 영남루 내 천진궁은 그의 작품이다.(바로가기 클릭)

그의 본명은 세린(世麟)이다. 부유한 농가에서 출생하여 6세부터 21세까지 한학을 습득했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밀양읍 신창학교, 대구 협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06년부터 3년간 대구부 토지조사국 측량과에서 수학을 배웠다. 1909년까지 비밀결사 대종동청년단에 가입한 우국지사의 한 명이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탄이 이뤄지자 국권을 회복할 동지를 구하고자 서울에 갔다. 그해 12월 대종교를 세운 홍암 나철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로부터 역사, 종교, 시국에 관한 말씀을 듣고 감명 받았다고 한다. 홍암은 그에게 단애(檀崖)라는 호를 주고 세복으로 개명시켰다.

▲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지도자 단애 윤세복 선생

훗날 단애는 “홍암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깨닫지 못한 일개  지사로 생을 마쳤으리라”라고 술회했다. 이후 사재 전부를 독립운동에 바쳤고 서북간도로 갔다.

서굉일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는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서북간도는 국내 진입이 쉽다. 또 고구려, 부여, 발해가 있던 우리 민족의 옛 영토였으며 이 지역은 무장독립전쟁이 일어난 곳”이라며 “단애는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시종일관 단 한 순간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이 35년을 버티었다.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가장 철저히 독립운동가로 살았다”라고 평가했다.

1942년 임오교변 때 그를 신문하는 일본의 법관에게 “참 감사하다. 내가 죽을 자리 없어 근심하던 차에 이렇게 나라를 위해 죽게 되었으니, 귀하는 나의 은인”이라고 치사하였다는 일화는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삼법회법(三法會通)’이란 선도(仙道)수련서를 냈다는 점이다. 이를 연구한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는 “"우리 고유의 선도사상을 바탕으로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보이는 지감, 조식, 금촉이란 수련법을 유도불(儒道佛) 삼교와 비교하면서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이라며 "삼법회통은 도교 관계의 독창적 창작이 거의 없었던 한국도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라고 말했다.

단애는 향년 80세인 1960년 2월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했다. 그는 2000년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 되었다.

■ 밀양 변계량 비각
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단애 윤세복 선생의 생애와 사상 및 업적의 현대적 조명’ ,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공동학술회의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