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북도 칠곡군 신동입석(제공=칠곡군청)

우리나라에서 남아있는 선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경상북도 칠곡군 신동입석은 높이가 4.5m, 밑 둘레 2m이다. 묘의 면적은 897㎡이다. 입석은 선돌의 또다른 표현이다. 현재 경북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신동입석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하는데, 확실하냐는 물음에 대해 칠곡군청 문화과 또한 대답을 주저했다.

중요한 것은 발굴 시기를 청동기로 본다는 점이다. 선돌의 동쪽 주변을 개간할 때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돌도끼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는 고인돌과 함께 고조선의 유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선돌 아랫부분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이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선돌(menhir)은 고인돌을 비롯한 돌널무덤, 둘레선돌(stone cirde), 줄선돌(stone alignment)과 함께 큰돌문화(巨石文化)의 한 유형에 속한다. 함북에서 제주까지 전국적인 분포를 하고 있다. 또한 서부 유럽을 비롯해 아프리카 북부, 근동지역, 시베리아, 티베트, 동남아시아지역, 몽골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하문식 세종대학교 교수는 “최근까지도 인도나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죽은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선돌이 건립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건립 시기로는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상당히 오랫 동안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칠곡 선돌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옥천 안터, 창원 아득이, 제천 황석리, 대구 진천동 선돌 등이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일까?

▲ 경상북도 칠곡군 신동입석(제공=칠곡군청)

첫 번째 농업생산의 풍요와 인구생산의 풍요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선돌을 쌓을 때 남성의 상징으로 끝을 뾰족하게 치석하거나 여성의 상징으로 끝을 넓고 평평하게 치석하는 경우가 그렇다. 선돌의 대부분 평지와 구릉 야산의 끝자락에 샛강의 물줄기를 따라 세워진 것은 농경문화와 관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수호 의지를 시사한다. 선돌양식은 가부장 및 부계씨족장과 마을 공동체 부계촌장의 강한 힘으로 마을의 안전과 안녕을 수호하고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과 심지어 질병 또는 악귀의 침입까지도 물리치겠다는 벽사 의지가 담겨 있다.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는 선돌을 마을 수호신의 표상으로 생각하여 신앙하거나 제사하는 민속도 발생한 것이다.

세 번째 무덤의 묘표의 의미와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위치가 고인돌이나 무덤 부근에 세워졌을 때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옥천 안터 1호 고인돌과 선돌, 그리고 청원 아득이 고인돌과 선돌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광개토대왕비’의 경우는 선돌의 기념비적 성격과 묘표의 성격을 종합한 전통을 크게 발전시키고 대형화한 경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구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칠곡군 신동입석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로 5-7 (바로가기 클릭) 

■ 참고문헌
하문식, 경기지역 선돌유적의 성격과 그 성격, 고문화72호, 한국대학박물관협회2008년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 지식산업사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