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가는데 난간에 섰던 친구가 뱃멀미를 한다. 얼굴이 노랗게 변하더니 이윽고 뱃전에서 구토를 해댄다. 이때 당신은 어떻게 할까?
그에게 다가가 등을 쓰다듬으며 안됐다고 이야기하면? 그건 동정(同情)이다. 친구가 있는 쪽으로 가서 구토하는 친구를 보고 당신 역시 멀미가 나서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공감(共感)이다. 미국의 마케팅 전문가 알렉스 맨더시언(Alex Mandossian)이 원격세미나에서 공감과 동정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고 한다. 설득을 하는 데는 이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사회에는 공감과 동정이 어떻게 나타날까? 누군가 불행에 처하면 우리는 함께 슬퍼하고 힘을 내도록 격려했다.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정하기도 하였다. 마치 내게 일어난 일처럼 함께했다. 그래서 불행에서 빨리 벗어나 다시 힘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불행한 일을 당한 이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위로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동정과 공감은 사라지고 오히려 비웃고 적대시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세월호참사 이후 그러한 일이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심지어는 단식투쟁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피자, 치킨을 먹기까지 했다. 이를 보고 우리가 이렇게 잔인해 졌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요구가 마음에 안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그들의 처지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는 것인가.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의 진상규명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수학여행 떠난 자녀가 죽었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부모라면 당연히 알고 싶어 한다. 그런 요구가 부당하다거나 도를 넘었다고 하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피해자 가족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전에 정부가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을 밝혀야 하는 게 정상이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득이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유가족들의 입을 막고 발을 묶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상처만 더욱 키우고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할 뿐이다.
세월호참사는 우리가 한 단계 더 성숙하고 안전한 사회로 가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개발시대에 앞만 보고 달려오다 소홀히 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안전이다.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경제보다 생명, 안전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울고 있는 이의 등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는 사람, 함께 울어주는 사람 지금 이런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더불어 사는 세상, 공동체가 살아난다.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우리를 다시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