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조선에 피바람 불었다
정유재란, 조선에 피바람 불었다
  • 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 승인 2014.11.06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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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이 전국을 휩쓸던 올 여름 정유재란을 조명한 책이 발간됐다. 김세곤 향토사학자가 역사 현장을 찾아 발로 쓴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도서출판 온새미로)'이 그것이다.  

1953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한 김씨는 고용노동부에서 일하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하여 지금은 호남역사연구원장으로 있다.  김 원장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향토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호남역사인물기행을 통해 호남의 정체성 확립과 자긍심 함양에 매진하고 있다.

이번에 펴낸 책은 2010년 3월부터 4년 5개월간 매달린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호남사람들의 삶과 대응을 마무리한 최종 작품이다.  김 원장은 2011년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1권을,  2013년 2권을 냈다.

그는 역사 기록 속에서 임진왜란 동안 호남사람들의 행적을 찾았고, 국내외 현장 답사를 통해 역사 기록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그 전쟁의 참혹함을 체감했다.

▲ 김세곤 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그는 일본 쿄토의 코 무덤에서 정유재란의 희생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실감했다고 말한다.

"정유재란 때 호남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인적, 물적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남원의 만인의총, 진원현의 폐현, 진원과 영광에서 베어간 10,040개의 코 증명서, 장성 기씨부인 일비장과 광주 양시 삼강문 함평 팔열부 그리고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은 정유재란의 참혹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책을 내면서, 5쪽)

이러한 피해 속에서도 호남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구례와 장성, 남원, 순천 등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김 원장은 이러한 내용을 찾아 책으로 엮었다.

1부에서는 이순신 백의종군과 칠천량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 전몰, 2부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과 남원성 함락, 전라도 초토화를 다루었다. 3부에서는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다루었다.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다.(…) 명량대첩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아내어 일본의 수륙병진책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조선수군의 재기 발판을 마련하였다. "(272쪽)

김 원장은 조선 수군이 극적으로 승리하게 된 요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전선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 둘째. 이순신의 전략 전술과 리더십, 셋째,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

4부에서는 전라도 의병의 활동과 전라도 백성의 수난을 다루고 이어 이순신의 수군재건과 왜교성 전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다루었다.

5부에서는 일본 교토의 코 무덤과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다루었다. 이 포로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으니 실상은 포로가 아니다. 전쟁을 틈타 일본은 민간인을 수없이 죽이고  수만 명을 납치해 끌고 갔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일본이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활자나 그림, 서적을 약탈하고 강항 등 유명한 선비와 도공, 인쇄공을  끌고가 성리학과 인쇄술, 도자기 제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일본 도자기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임진왜란을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반면 조선은 임진왜란, 특히 정유재란의 후유증이 너무나 심각했다. 인구가 크게 줄고 농토가 황폐하여졌다. 향촌사회가 무너지고 촌락은 폐촌이 되었다. 전남 장성 진원현은 독자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어 1600년 장성현에 통합되었다.

이 책에서 다룬 역사는 이렇게 아프다.  이러한 역사를 잊지 말자. 김 원장이 5년 가까운 세월에 매달려 3권의 책으로 정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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