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외국을 알려고 할 때, 관련 자료를 보거나 읽고 관련 전문가나 그 나라 사람에게서 나라 사정을 듣는다. 이렇게 하여 한 나라에 관한 '앎'이 형성된다. 우리가 하듯 외국인들도 '한국'을 이렇게 알아갈 터. 그들이 아는 한국, 앎. 즉 '한국의 지(知)는 어떤 것일까. 또 우리가 아는 한국의 지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이 낯설다. 그 동안 온통 외국을 배우는 데 급했으니까.

 우리가 '한국의 지'라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내는 사이, 오랜 세월 한글을 사랑하고 공부해 온 한 정열적인 일본인 학자 한 사람이 '한국의 지'에 주목했다. 노마 히데키ㅡ한글 연구로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인 언어학자다. 노마 히데키 일본 국제교육대학 객원교수는 세계문자사에서 '한글'의 혁명성을 말하는 책 '한글의 탄생'으로 2010년 마이니치신문사와 아시아조사회 주관 제22회 아시아 태평양상 대상을 받았다. 또 2012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글학회 주관 제6회 주시경상을 받은 인물이다. 

'한글의 탄생'은 일본인 언어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보편적 ‘문자’로서 한글의 모든 것이다. 일본인 학자이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맥락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한글의 구조를 통찰하며 ‘소리가 글자가 되는’ 한글의 혁명성을 철저한 이론적 근거와 탁월한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2010년에 출간된 이 책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노마 히데키는 일본에서 한국의 드라마, 음악, 문학 등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서 '한국어권의 지(知)'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어권에서 감상하고 누리고 애호하며 감동하는 대상으로서 한국의 문화는 존재해도, 읽고 듣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고투를 벌이며 함께하는 자기 것으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대상으로서 한국의 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지'를 책으로 펴내 일본사회에 제시하기로 했다. 노마 히데키는 한일 양국의 지식인 140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한국의 지를 알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한국의 ‘지’와 만나게 해 준 책을 1권에서 5권 정도 추천하고 그에 관한 여러분의 생각을 적어 주세요."

한 사람의 지식인은 한 나라의 ‘지’와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될까? 지식인과의 만남, 예술 작품을 통한 간접 경험 등 여러 경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한 가지다. 책! 그렇다. ‘지’는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지’의 전달자 ‘지식인’들에게 한국의 지와 ‘스친’ 순간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여기서 ‘지식인’은 ‘한국의 지식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본어권의 학자가 기획자로 나선 만큼 한국과 일본의 대표 지식인들을 모두 아우르며 보편적 지로서의 ‘한국의 지’를 살펴본다. 한 희귀하고도 열정적인 학자의 비범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노력으로 한일 양국 140명의 지식인이 ‘한국의 지’를 논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사상가, 언어학자, 소설가, 현대미술가 그리고 영화감독까지 한 나라의 ‘지知’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하지만 노마 히데키의 편지에 지식인들의 반응은 미지끈했다. 응답률은 고작 20%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어권 지식인들은 "한국의 지에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집필 자격이 없다"고 했다. 한국어권 필진은 "이런 방대한 주제에 걸맞은 글을 쓸 자신이 없다"고 했다. 노마 히데키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

"한국의 지 전체에 입각하여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꾸로 그런 일 자체가 지극히 곤란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식에 관여하고 계신 여러 분에게는 반드시 한국의 지와 스친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순간을 공유하고 싶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한국의 지에 다가가는 소중한 실마리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처음 기획된 2013년 3월경부터 일본어판이 출간된 2014년 2월까지, 노마 히데키와 필자 140명은 한국의 지를 규명하기 위해 1,000통이 넘는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쿠온 출판사에서 '한국・조선의 지를 읽다'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2014년 2월.

'한글의 탄생'이 ‘지’의 관점에서 한글을 조명한 노마 히데키의 첫 번째 ‘지’ 프로젝트라면, '한국의 지를 읽다' ‘지’의 관점에서 한국의 지 전체를 조망한 그의 두 번째 ‘지’ 프로젝트다. 한국의 지식인 46명, 일본의 지식인 94명이 ‘한국의 지知란 무엇일까?’라는 뜻밖의 질문에 진지하고도 열정적인 답변을 남겼다. 140명이 ‘한국의 지’와 부딪힌 순간을 담은 이 책은 이런 길고도 치열한 시간을 통해 완성되었다.

2014년 2월 '한국·조선의 지를 읽다'는 출간과 동시에 일본 지식사회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예술신초 등 언론에 보도되었다. 또 2014년 10월 1일 제12회 파피루스상 수상작에 선정되었다. 파피루스상은 일본에서 ‘제도로의 아카데미즘의 이상으로 달성된 학문적 업적’이나 ‘과학 저널리스트에 의한 실적’을 이룬 출판물에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 2003년 제1회에는 자연철학자이자 1960년 말엽의 반체제 학생운동인 전공투(全共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1941~)의 '과학의 탄생'(한국어판 제목)이 수상했다. 이 책은 마이니치출판문화상과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상까지 수상하여 독서계의 화제가 되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이 책 '한국의 지를 읽다'의 일본어권 필자로도 참여했다.

이 일본에서 나온 '한국ㆍ조선의 지를 읽다'가 번역되어 위즈덤하우스에서 '한국의 지知를 읽다'로 발행되었다. '한국의 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식인들은 어떤 책을  통해 한국의 지를 접했을까. 사상가이자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번역하여 일본에 러시아 문학 붐을 일으킨 가메야마 이쿠오는 김지하의 '불귀'를 추천했다.

'화산도'라는 방대한 작품으로 제주 4·3사건을 고발한 재일한국인 작가 김석범은 문경수의 '한국현대사'를, 일본의 대표적 출판사 헤이본샤의 출판인 류사와 다케시는 김구의 '백범일지'를,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리영희의 '분단민족의 고뇌'를 추천했다.

'창작과 비평'의 창간인이자 한국 재야 원로의 좌장격인 백낙청은 김석철의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을,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은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이제는 한국문학의 얼굴이 된 신경숙은 최인훈의 '광장'을,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영화감독 이명세는 고은의 '이중섭 평전'을,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이상남은 구보타 시게코의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추천했다. 모든 책이 ‘한국의 지’라 부르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면서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만큼 다양하게 한국의 지를 조망한다.

여러 사람이 추천했지만, 압도적인 추천을 받은 책이 없다는 점이 재미있다. 일본어권 필자들이 추천한 책은 총 265종이다. 이 중에서 필자들의 누적 추천을 받은 책의 종수가 고작 26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책이 단 2번의 추천을 받았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책이 6번이다. 상식으로 한국의 지를 대표하는 책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지식인들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 흩어져 있는 지식의 총체가 ‘지’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책은 무엇일까? 일본어권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책은 이 책의 편자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이다. 아마도 이 책의 편자의 저서라 쉽게 눈에 띄었다는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외에도 매우 많은 숫자의 한글 관련 책이 ‘한국의 지’를 만나게 해 준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것은 ‘한글’의 지적 성과가 ‘한국의 지’ 전체에서 그만큼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음으로 많은 추천을 받은 것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김중혁 단편집 '악기들의 도서관'이다. 일본과 한국 양국의 지식인들의 추천한 도서 중에는 문학작품(에세이 포함)이 많았다.(일본어권 추천 도서의 경우 전체 도서의 27%). 이것 또한 의외의 결과로, ‘지’라고 하면 으레 어려운 사회과학서나 연구서를 떠올리기 쉽지만, 지식인들은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 주고 정서를 드러내는 문학작품을 한 나라의 매우 중요한 ‘지’의 요소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어권 책은 총 135종이다. 한국어권 필자들의 경우 중복되는 책이 일본어권 필자들보다도 적어서 단 5권의 책만이 중복 추천을 받았다.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것은 '김수영 전집'(전2권)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전7권)로 각 4번의 추천을 받았다. 이외 박경리의 '토지'(전20권)와 이상의 '정본 이상 문학전집'(전3권), 이우환의 '만남을 찾아서'가 각 2번의 추천. 이를 보면 역사적 가치와 함께 대중성을 중요한 선정 기준으로 고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어권 필자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한국의 ‘지’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로 봤다(한국어권 필자 전체 추천 도서의 31%가 문학작품).

한국어권과 일본어권 필자가 공동으로 추천한 책은?

최인훈의 '광장',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전7권),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박경리의 '토지'(전20권),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이다.  학문적 가치와 작품성은 물론이고 대중성까지 확보한 이와 같은 책들을 한일 지식인들은 한국의 ‘지’로 꼽았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문화지성사적 교류를 해 왔다. 하지만 근대 이후 양국은 역사의 질곡으로 인해 그러한 밀접한 교류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했다. 더욱이 양국 모두가 서구 중심의 지적 전통과 흐름을 수용하고 따라잡는 데 주력해 온 점 또한 한일 양국의 역사 저변에 흐르는 지적, 문화적 교류사를 외면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는 주로 근현대에 이루어진 ‘한국의 지’에 관한 이해를 다루었지만, 앞으로 한국어권과 일본어권의 오랜 지적 교류를 연구하고 의미 있는 결과물을 생산하는 작업에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지를 읽다"

 저자 노마 히데키|역자 김경원|위즈덤하우스 |2014.10.10
페이지 752|ISBN 9788960867314|판형 규격외 변형